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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803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8-03 조회수323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8월 3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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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람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보곤 합니다. 늘 복음, 복음 하는데 실제 복음에 대해 속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분은 배운대로 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담은 4권의 책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복음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말 뜻 자체에 대해서는 들은 적도 생각해본 적도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전해주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거의 전부이니 말입니다. 


복음은 '복된 소리' 혹은 '기쁜 소식'  정도로 풀어 표현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풀이가 아니라 그 뜻이 진짜 '복되고', '기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이 4권의 책에서 어떤 기쁨을 느낍니까? 기쁜 부분을 찾으려 노력을 해야 할까요? 복음의 의미는 아마도 예수님에게 있을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특별히 구별된 단어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기뻐하는 모습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그것은 복음 속의 일부일 뿐 전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도 답은 아닙니다.


열쇠가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은 예수님 자체가 복음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의 증언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고, 그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라고 말하기에 우리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우리의 일상에서 오는 기쁨의 순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고, 당신의 사랑을 주셔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하늘나라의 씨앗을 뿌리신 것을 말합니다. 


죽어서야 가는 세상. 그것도 심판이라는 무서운 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죄와 벌로 이어지는 하느님의 전지전능에 맡겨진 내 인생을 벗어날 수 없었던 나의 삶을 예수님이 오셔서 모두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에서부터 살아야 하고, 심판의 주님이 사랑의 주님임을 바로 알아야 하며, 피해서 살고 바쳐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그분처럼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하느님의 뜻임을 하느님의 모습과 그분의 삶을 통해 알게 된 것이 복음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이기적으로 만들어 온 잘못된 관행을 지키기 위해 그 하느님을 죽였지만 그분은 부활로 하느님의 뜻이 결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또한 사랑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겐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고, 그 하느님이 멀리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이 기쁘며, 우리의 고통과 짐을 하느님이 모르시지 않는다는 것이 기쁘고, 이미 우리 안에 자리한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그것을 기준으로 하느님의 판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기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과 이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알게 되었고,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기쁜 소식이며, 그분의 일상을 살피는 것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굳이 내 삶의 기쁨을 찾아내려는 수고 없이도 예수님을 보면서 자연스레 나의 삶의 모든 부분이 밝아지고 힘들고 고달픈 순간에도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당황스런 예수님의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사람에게 무관심한 예수님, 청해도 냉정하기만 한 예수님, 당신의 사랑에 칼 같은 기준을 가지고 계시기에 사람을 차별하시는 예수님이 복음에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결국 예수님을 돌려세운 한 어머니의 말이 있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전혀 기쁜 소식을 전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냉정하고, 차갑고, 거칠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단호함을 무너뜨리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지키려는 이방인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만은 아닙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 앞에 자신을 강아지로 비하하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복음을 읽으면서 앞서 본 냉정하기만한 예수님은 우리가 느끼는 하느님에 대한 인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우리의 입에서, 모습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모습이란 지독히 이기적인 울타리를 가지고 계시고, 그 울타리 밖에 것에는 어떤 은총도 사랑도 없는 게다가 당신의 사람 이외에는 사람으로도 인정이 되지 않는 강하고 거친 성격의 신입니다. 그럼에도 사랑, 은총이란 말을 하나가득 안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니 아무리 복음을 읽어도 기쁘지 않고, 그분의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 느끼는 것은 그분의 능력 앞에 꿇어 따르는 것이 은총을 받는 유일한 길이라 여기는 모양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당신을 형제라 하셨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분을 '주인님, 주인님'하고 주님이라 부르는 것에 더 익숙한 것처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돌려세운 것은 세상이 보여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스스로를 망가뜨림도 불사하는 생명의 존귀, 인생의 가치 또한 무너지면서도 딸을 살리려는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살릴 수 있다. 구할 수 있다"  이 어머니의 믿음은 신앙 앞에 하느님께 가지는 신앙의 모습이 아닌 사랑 하나에 담겨 있는 사람의 가장 거룩한 모습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은 여인의 모습에 칭찬과 함께 바로 그 여인의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말씀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아픈 아이를 낳게 하십니다. 주님을 기쁘게 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하느님이 빈틈을 보이는 사건이 됩니다. 적어도 냉정하신 하느님도 어머니의 사랑 앞에서는 은총을 허락하시는구나 정도의 여유가 생긴 셈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기적은 하느님의 진정으로 원하시는 사랑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사랑을 배웠다는 알고 있다는 이스라엘 인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려 보여주시려 오신 주님이시지만 그 사랑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앞에서 예수님은 그녀가 바라는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 어머니의 믿음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하심은 그 여인의 사랑에 하느님의 가르침이 깨우침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은 이 어머니의 헌신적임과 같습니다. 비굴해지거나 자학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 함께 하고픈 삶을 사는 것이 사랑의 근본입니다. 그 사랑을 주신 하느님이시니 그 사랑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는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삶을 흘러가듯 두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복음은 당황스런 하느님과 참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예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고집센 이스라엘에게 참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이길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증언은 사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짐승으로 여기는 믿음 없는 이들에게서 하느님이 그토록 바라시는 사랑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 앞에 주님조차 부끄러운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복음 속에 예수님,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그 모든 것이 바로 이 어머니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원하셨음을 아신 아들의 희생이었고,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복음이 지식이나 훈계가 아닌 정말 기쁨이 되는 날들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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