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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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인옥 | 작성일2011-08-04 | 조회수790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오늘 독서에서는 주님께서 그토록 어여삐 여기시던 모세를 꾸중하신다.
사막에서 떠돌아야 했을만큼 또 가나안에 들어갈 때쯤, 모세의 수명이 다 끝났다는 것이다. 미르얌이 수명이 다해 죽은 것처럼.
진실이 무엇이든간에 후대의 백성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모세와 아론에게 덤벼들었고 주님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너무나 간결하다. 모세에게 지팡이로 바위를 쳐 물을 내라는 것이다. (주님의 명령은 늘 너무나 간단해서 어이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믿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그 간단한 말씀을 믿는다. 이제까지 그분 말씀대로 해서 안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막 밖으로 나갔다. "이 반항자들아, 들어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주랴?"
모세는 그러고나서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탕탕 쳤다.
그런데 주님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꾸중하신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가 문제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백성에게 '반항자'라고 화를 냈다고 그러셨을까? 하도 시달리다 보면 성질이 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시나이 산에서 십계판을 받들고 내려왔을 때, 그날 모세는 하느님이 손수 쓰신 증언판을 깨뜨리고, 금송아지를 가루로 내어서 백성에게 마시게 하고 그래도 모세를 벌 주지 않았던 주님이다. 아, 가만히 보면 확연히 차이나는 것이 있다.
간신히 진정시키고 산에서 내려왔다.
주님은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모세에게 다른 민족을 크게 일으켜 주겠다고 새롭게 제안을 하신다.
모세는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만일 그랬다가는 주님은 다른 민족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하면서 자신에게 해주신 그 옛날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마음을 어르고 달래기에 여념이 없었다.
만일 자신의 청을 들어주기 싫으시다면 자신도 주님의 책에서 지워버리시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노기를 풀으셨다. 모세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기보다 어쩌면 모세가 그렇게 하기를 바라셨을지 모른다.
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하느님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린 놈이 잘못을 하여 야단을 쳐야 하는데, 큰 놈이 신나서 회초리를 찾아오면 그놈부터 때리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그런데 동생이 아플까봐 회초리를 감추고 형이 나서서 대신 빌며 매달리는 모습을 본다면 서슬 퍼렇던 부모는 슬그머니 용서를 하게 되고 큰 놈이 대견하고 든든해서 작은 놈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게 된다.
바로 그거다!
말하자면, 그 옛날의 모세의 분노는 주님의 의노(義怒)를 대신 전해준 대변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는 백성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고 용서를 빌었다.
물이 없다고 아우성대는 백성. 그것은 인간이 살기 위해 내는 당연한 소리이다.
주님은 인간의 생존의 욕구를 기꺼이 채워주시려고 하셨는데, 그들 중에는 노인들과 젖먹이들, 환자들과 말못하는 가축들까지... 아니 도대체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주님은 그들에게 화를 품지 않으셨는데.... 모세와 아론은 주님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러면서 '우리가..... 주랴?' 하느님이 주시는 물을 마치 자기들이 주는 것인양 말하고 있다.
그 물은 하느님의 거룩함, 주님의 영광을 나타낼 물이고 백성들은 그 물을 마시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것이었다.
사실 므리바 샘에 대한 이야기는 본디 탈출 17,1-7에도 있으나 성경의 최종편집자는 그러지 않는다. 모두 거룩한 전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는 마치 두번, 세번 같은 일이 반복해서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많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걸 따지지 말고, 최종편집자의 의도대로 이런 사건이 모세의 후기에 또 있었다고 보자.
므리바의 이야기로 설명하면서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이끌 지도자(왕, 사제, 예언자)들은
그들은 주님의 의도를 그대로 전해야 하며, 하느님께 반(反)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백성들을 위해 언제라도 기도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라해도 말이다.
물론 그들이 일반 사람들이라면 그런 혹독한 질책과 처벌을 받진 않았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한 교실에서 공부하던 졸업 동기들이 사제품을 받고 나간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대부분의 동기들이 보좌신부로서 잘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정말로 신나고 마음이 뿌듯하다. 하지만 강론대에서 원고를 집어던지고... 자기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신자들에게 폭언을 하고... 강론, 기도 생활 엉망이라는..... 소수의 신부들 소문을 들으면 왠지 모를 배신감과 분노가 솟구친다.
아무 공로 없는 나도 이런 마음이 드니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납작 엎드려 서약을 하던 그는 어디로 갔는가? 벌써부터 초심을 잃은 것일까? 원래부터 그랬는데 모르고 있던 것일까?
아무튼 민수기의 저자도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을 대신해서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은 말을 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은 매사 조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야 모든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정치, 사회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더욱 높게 실현되어야 할 가치이다.
한 여름 푹푹 찌는 무더위 한달 동안 이번에는 입학 동기들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사제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마지막으로 공부하는 '부제학교'에서....
내일이면 부제 학교도 끝나고 며칠 남지 않은 사제 서품을 위해 대피정에 들어갈 것이다.
부디 이들이 민수기 저자의 소리를 골수에 새겨넣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두 손 모아 기도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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