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배티 성지 - photo by Y.benedict
†찬미예수님
우리 성물집 옆에 알퐁소 성인의 아주 아름다운 글귀가 있습니다.
4년이 지나가도록 신자들에게서
‘신부님 저 말뜻이 뭔지를 한번 설명해 주십시오.’
하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저 뜻을 묵상하면서 저 의미가 무슨 뜻인지 느끼기까지 삼년 이상이 걸렸었어요.
'아~ 그런데 우리 신자들은 저 쇠판을 걸자마자 그 다음날 다 깨쳤구나!.'
영성적으로 우리 진천 신자들을 따라갈 신자들이 없는 겁니다.^^
거기 첫줄이 뭐라고 써 있어요?
지나가면서 보기는 봤는데...유심히 보고 곗돈 낼 날짜는 안 잊어버려도
성당 들어와서 성인이 하신 말씀은 귀에 안 들어오죠?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오라.
홀로 머물러라.
딴사람이 되어 나가라.
뚜띠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와라.
허깨비 몸뚱아리만 이 자리에 들어와 앉아있지 말라!
성당 울타리 안에 들어올 때는 마음까지 같이 끌고 들어와라 이거예요.
지금도 안 늦으셨어요.
몸뚱아리만, 껍데기만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들
빨리 지금 저기 교성리에서 헤매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읍내리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친정집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빨리 오라 그러세요.
들어와 앉았습니까?
두 번째, 홀로 머물러라.
마음이 들어올 때 깨끗한 마음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오만 잡 마음이 같이 들어오지요?
화나는 거, 미워하는 거, 돈에 대한 걱정, 병에 대한 걱정, 집안일 등등
온갖 분심 잡념이 그 마음에 섞여서 같이 들어와요.
‘홀로 머물러라.’
라는 뜻은 온갖 분심 잡념 다 떨쳐버리고 오로지 가장 깊은데
있는 내 깨끗한 마음만을 가지고 지금 이 제단 앞에 앉아있어라!
홀로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그 몸동작이 아주 중요해요.
사제가 제대 쪽에서 바라볼 때, 신자들이 제일 예쁜 모습이 어떤 모습이겠느냐?
강론 때 눈을 땡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모습, 그것도 예쁘지.
강론 때 주보 펼쳐서 딴 짓하는 사람보다는.....
그렇게 나랑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 키 큰 사람 뒤에 있으면 요렇게 고개 돌리고.... 요렇게
고개 돌리고...고것도 예뻐!
그런데 제대에서 미사 끝날 때까지 제일 눈이 가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손을 정말 아름답게 합장한 모습으로 끝날 때까지 있는 사람들....
이 모습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우리들의 마음이 이 모습 그대로 따라가요.
그래서 신학교에 가면 신학생들은 한사람도 예외 없이 이렇게 합니다.
수녀원에 가서 피정을 시킬 때도 보면 청원자들, 지원자들 아니면 갓 수녀가 돼서 나온 사람들은
으례껏 이렇게 해요.
그런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면서부터 미사 때 보면 이렇게 돼요.
수녀님들 몇이 앉아있어도 딱 보면 표시가 나요.
이쁘게 하고 있는 아직 저 수녀님은 신참이구나!
신참이라고 하는 말은 뭐냐?
아직 때가 안 묻었다는 그 뜻이에요.
기도손을 할 때 우리 손가락 끝 열 개는 어디를 향합니까?
하느님을 향해요.
엄지손가락 두 개는 십자가를 만들지요.
‘내가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을 향해서 올라가겠습니다.’
예비자 때에 분명히 어떻게 교리를 배우느냐?
우리 신자들의 전례 때 손의 모양은 엄지손가락 두 개로 십자가를 만들어서 기도손을 하는 겁니다.
예비자 때 그리고 세례 받고 나서 한 일 년 정도는 이렇게 해요.
그러다 요 손이 어떻게 되느냐?
요렇게 깍지를 끼기 시작합니다..
깍지를 끼면 손가락 끝 열 개를 누구를 향합니까?
땅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요 다섯 개는 땅을 향하고 다섯 개는 지를 향해.
그래서 사제가 제단에서 볼 때 정말 예뻐 보이는 사람들은
카톨릭적인 합장을 하는 사람.
신부님들이 많이 모이는 사제서품식 때 보면
연세가 많은 신부님도 이렇게 합장을 하면서 미사 내내 거룩하게 전례에 임하시는 신부님들이 있어요.
그 신부님은 60, 80이 되셨어도 후배들이 볼 때도 ‘아~ 저 신부님은 정말 예뻐 보인다.’
어느 신부님은 팔짱을 낀다던지 아니면 요렇게 앉았다든지 하면....어느 쪽이 더 보기 좋아요?
마찬가지로 사제가 여러분을 볼 때도 이 모습이 제일 예뻐요.
다시 말하면 마음에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게 되어있죠?
브랑시코 살레시오 성인이 뭐라 그랬어요?
‘마음은 행위의 원천이고 행위는 마음의 반영이다.’
내가 정성스럽게 무릎을 꿇으면 내 마음도 꿇어지는 거고
내손이 하느님을 향해서 이렇게 모아지면 내 마음도 모아지는 거예요.
홀로 머물게 되는 겁니다.
전례 중에 홀로 머무는 방법 중에 하나가 자세입니다.
강론 들으면서 다리를 꼬고 앉았거나 아니면 팔장을 끼고 앉았으면
그 사람 마음은 이미 다리가 꼬이듯이 꼬여있는 겁니다.
강론 중에 주보 보면서 딴생각하고... 그건 홀로 머무는 게 아닙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와라.
몸뚱아리와 마음을 같이 끌고 들어와서 이 자리에 앉아있다면
끌고 들어왔던 세속적인 것, 다 떨쳐버리고 홀로 머물러라.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해라.
첫 번째 두 번째 것이 이루어지면 세 번째 것이 이루어집니다.
세 번째, 딴사람이 되어서 나가라.
성당 들어오기 전에는 세상 고통 때문에 분심, 잡념 분노 속에 온갖 우거지상을 하고 들어왔어도
미사 전례가 진행이 되는 동안 사제의 입을 통해서 치유를 받고 성체를 통해 치유를 받으면서
사제 입에서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할 때는
새사람이 되어서, 성당 문을 나갈 때는 마치 성령을 받은 12제자가 다락방 문을 박차고
세상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듯이 그런 얼굴이 돼서 나가야 됩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와서 홀로 머물다가 딴사람이 되어서 나가라!
저는 저 성인의 저 구절을 신학생 때부터 참 좋아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 본당에 나가면 저 글귀를 신자들이 잘 보이는데다 세워두리라.’
여러분들 그렇게 수없이 몇 년 동안 오르락내리락 했으면서도 이제야
‘아 그게 그 뜻이구나!’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와라.
(인뜨라테 뚜띠)
홀로 머물러라.
(마니떼 쏠리)
딴사람이 되어서 나가라.
(엑씨떼 알리)
오늘 복음에 세 종류의 인간이 나옵니다.
복음 첫머리에서 하느님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고 그랬습니까?
아니면 인간 사랑하는 것이 먼저라고 그랬습니까?
당연히 하느님 사랑하는 것이 먼저요.
네 마음과 힘과 모든 것을 다해서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서 하느님으로부터 얻은 그 힘을 가지고 사람을 사랑하라.
참되게 진실 되게 올바르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거짓되게/ 위선적으/로 형식적으로/ 자기체면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 하는 사람은
한 번도 사람을 사랑을 못하고 죽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는 종교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인간은 자기들 깐에는 이 세상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제사장이었고 레위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 안에는 위선과 가식과 허위가 잔뜩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정말 사람을
사랑해야 되는 순간에는 외면을 하고 떠나버립니다.
하느님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윤리덕의 제일 중심이에요.
첫 번째 인간은 누가 나옵니까?
<제사장>
이 제사장은 길을 가다가 반쯤 죽은 사람이 살려달라고 손짓도 못하고 이렇게 어프러져 있는 걸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저거 죽은 거 아니야? 저거 시체가 아닐까?’
그때 민수기 11장 14절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길을 가다가 시체를 만지면 7일간 부정하다. 특별히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들이 시체에 손을 대면
자기 차례가 와도 제사를 못 지낸다.’
시체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가서 이렇게 보니까 피투성이가 되어있었겠지요?
‘아이구, 저거 어째? 사람이 도둑놈한테 당했나보네!’
만지려고 하다가, ‘아차 내가 이 시체 만지면 이게 혹시 죽은 인간이라면 내 차례에 내가 제사를
지낼 수 없어. 안 되지... 난 이제껏 제사를 빠져본 적이 없어.’
이 제사장은 형식주의 형의 인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성당 오는데 길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복통이 나서 길에서 떼굴떼굴
구르고 있어서 그 사람 데려다가 병원에 가느라고 주일 미사를 못 봤다!
이건 성사거리가 아니라 하느님께 칭찬 받는 겁니다.
반대로 주일미사 나오는데 길에서 누가 나를 도와달라고 하는데.
‘미안합니다. 나 지금 미사 보러가는 길이니까 나보다 좋은 사람 사마리아사람 뒤에 올지 몰라요.’
그 인간은 그 날 아무 축복도 못 받고 그것 자체를 성사 보셔야 되요.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연결된다는 것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그 사람 도와주고 오는 것
이게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어느 자매는 자기 머릿속에 ‘나는 하루에 묵주기도 100단..까떼나 바쳐야 되고.....’
성당에서 정말 기도 열심히 하는 자매예요.
집에 가서도 촛불 켜놓고 항상 기도합니다.
그러나 건넌방 문만 열면 악취가 그냥 코를 찔러~~ 왜 그런 줄 아세요?
중풍 걸려 몇 년째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를 제대로 간수를 잘 안 하는 거야~~
머리에는 서캐가 허옇게 들어가 있고....똥을 싸고 앉아 뭉개고...
마르면 과자인 줄 알고 또 떼어 먹어~~빠닥빠닥하니까
그런 시어머니 그대로 내버려두고 거실에 앉아 촛불 켜놓고 묵주신공 20단 못한 것 마저 해야 돼!
그것 다 쓰잘 데 없는 거야....
예수님이 지금 똥 싸는 시어머니로 앉아 계시는 거예요.
그 기도 누구한테 바치는 겁니까?
하느님한테 바치는 기도인데 ...그 똥 싸는 시어머니가 바로 예수님으로 변장해서 앉아 계신데
어디 가서.....묵주신공한다고... 예수님 만나는 겁니까?
제일 빨리 예수님 만나는 것은 빨리 시어머니 목욕시켜 드리고 깨끗하게 내가 정성을 다해서
간호하다 오늘 묵주신공 못해도 그거 죄 아니에요.
밤새 치매 걸린 시어머니한테 들볶이는 것 때문에 기도생활 아무것도 못했어도 그것 죄 아니에요.
그것 하고 난 다음에 잠을 좀 덜 자고 마저 기도하면 더 이쁘지~~
그러나 힘이 벅차서 그것 못해도 죄가 아니다...이거야.
제사장은 자기 삶 가운데 있는 그 형식에 매여서 강도 만난 이를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이 지나간 다음에 레위인이 왔지요?
레위인도 제사장에 지지 않을 만큼 율법에 정통한 사람들이었고 철저하게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레위인은 무관심주의자였어요.
그 당시에 강도들이 죽은 사람 흉내를 내고 가만히 누워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주러 오면
칼을 들이대는 일이 빈번히 있었어요.
이 레위인도 처음에는 도와주러 접근하다가 혹시 이놈이 나한테 칼을 들이대면 어떡하지?
에이, 그냥 가야지....괜히 관여했다가 잘못되면 어떡해~~ 내 갈길 가야지....‘
이기적인 인간은 무관심주의를 낳습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병이 바로 무관심주의입니다.
스테파노, 일어나 봐... 내가 질문 하나 할게... 전철을 타고 가는데 사람이 꽉 찼어...
스테파노가 보니까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 주머니에서 소매치기가 지갑을 꺼내는거야....
그 놈들은 세 놈 네 놈이 한 패가 되어서 몰려다녀요~~~그랬을 때 어떻게 할 거야...솔직히 말해 봐!
일어나서 그 사람 내가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때려잡을 거야!
아니면 도둑이야 하고 소리 지를 거야..어떻게 할 거야~~솔직히....소리 질러?
회장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똑같은 경우~~ 막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그 중에 한 놈이
째려봤어~~그랬을 때 어떻게 하실거야...
그래도 스테파노는 젊으니까 소리는 지른대...자신이 없으시지...회장님 70이 넘으시니까 사실
힘이 있어야 데리고 싸우시지...
요즘 현대인들은 열 명이면 열 명이 다 그런 모습을 보면 반응은 두 가지
안 졸던 사람이 갑자기 졸아~~ '나 못 봤어!!! '
아니면 밖에 쳐다본대요.
당하는 사람은 안 되었지만 당신이 알아서 해결하시오!
또 괜히 참관했다가 경찰서 가서 조서도 써야 되고 증인 되어야 하고....
아유, 나 지금 바쁜 사람이야~~
요즘은 '도둑이야~~' 하면 안 나와요!
뭐라고 소리 질러야 나와요?
‘불이야~~~’
‘도둑이야~~ ’ 하는 소리가 들리면 내 방문만 잘 걸어 잠그면 돼!
‘불이야 ~~’ 하고 소리 지르면 저 집에 불이 우리 집에도 올 수 있으니까...나와요.
도둑이야 하면 안 내다봐요. ...그러니까 죽는 거예요.
옆집에서 비명소리가 들려도 신고 안 해...니가 알아서 해!
이것이 바로 복음에 나오는 두 번째 레위형의 인간, 무관심주의자입니다.
제가 청주 본당에 있을 때 41살 된 자매 하나가 행방불명된 지 6개월 만에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왔어요.
어떻게 없어졌느냐!
그 사람 남편이 대우그룹 간부인데 서울역 앞 대우빌딩 앞에서 남편 만나 점심을 먹고 지하도를
지나서 광장을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남자가 나타나더니 귀싸대기를 때리기에
“아저씨, 누구세요?”
"어쭈, 이 년이 서방 보고 아저씨~~너 바람 피고 돌아다니면 내가 못 찾아 다닐 줄 알았냐~ "
하면서 길에서 막 밟더래
사람 살리라고...나 이 사람 모른다고....아무리 모른다고 소리를 질러도 수백명이 이렇게 보면서~~
‘어, 바람 난 여자 남편이 찾았구먼!’
전경들이 몇 명 있으면서도 씩 웃으면서 자기 맞는 걸 보면서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더래..
멱살을 잡아 봉고차에 잡아넣으려고 해서 봉고차 문을 잡고
'사람 살리라고~~ 나 이 사람 모르는 사람이라고~~ '
설령 바람난 여자를 남편이 잡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후드려 패면 누구라도 와서 말렸을 거다....
이거야... 아무도 말리지 않았대요.
청량리 창녀촌에 끌려 가서 소위 기둥서방이라고 하는 남자 다섯 놈들한테 강간을 당하고
그날부터 6개월 동안 하루 20명씩 남자를 받았대요.
안 받으면 두들겨패니까... 6개월 만에 맨발로 도망을 쳐서 경찰서에 신고를 해서 온 거야
그 자매는 즉시 정신병원으로 들어갔어요.
벌써 7~8년째인 데도 아직도 정신병원에서 못 나와요.
그 상처가 너무 커서...자기는 자기를 짓밟은 그 놈들도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서울역 광장에서
자기가 그렇게 살려달라고 도움을 청할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그 사람들 ...죽이고 싶대요.
그 상처가 깊어서 치유가 안 되어요.
그 집안은 풍지박산이 났습니다.
남자는 어떡하다 여자 만나서 살림 차리고 여자는 아직도 병원에 있고~~
그 서울역 광장에 있는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이예요.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있어도 우리들 마음은 아마 똑같을 거예요.
‘어유, 안 됐네~~~ 누가 가서 좀 도와주지~~’
이런 동정의 마음은 있어도 내가 가서 그 일을 못합니다.
무관심주의가 지옥에 갈 만큼 큰 죄라는 것이지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스스로가 종교인이나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막상 인간을 도와주어야 할 그 순간에는 꼬리를 딱 내립니다.
무관심의 죄가 얼마나 큰지는 부자와 라자로에서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악행을 행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선을 못 베풀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한테 해 끼치지 않고 누가 나 도와달라고 할 때 니 일 니가 알아서 해라!
다시 말하면 착하게만 살아서 천당에 못 갑니다.
적극적인 선을 베풀어야 됩니다.
세 번째 등장한 사마리아 이 사람은 유대인과 딴 나라 사람들과 피가 섞였기 때문에 정통
유대인들이 볼 때는 우리 유대인을 더럽힌 존재들, 혼혈아...트기라고...불쏘시개로 쓸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깔보았던 그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는데 유대인이 다 죽어서 인사불성이 되어서 누워있지요.
유대인의 규칙대로 살지 못하는 이단자일지는 몰라도 사마리아 사람은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에는 그가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많은 천주교사람이 그 사람을 다 피해 돌아갔는데 성당이라고는 발 한 번 들여놓지
못한 일반 외인이 그 어느 사람을 살려주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여섯 가지 치유의 방법을 택합니다.
먼저 가여운 마음이 듭니다.
그 다음에 갑니다.
가여운 마음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직접 그 사람 앞에까지 가는 것이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세 번째, 상처를 싸매줍니다.
네 번째 단계는 나귀에 태우고 그 사람의 몸을 치유할 장소를 찾아가 줍니다.
다섯 번째 단계에는 돈을 주고 잘 부탁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에는 A/S까지 확실히 합니다.
만일 돈이 모자라면 내가 나중에 돌아와서 다시 갚아 줄 테니까 이 양반 좀 잘 돌보아주십시오.
사마리아 사람은 입으로만 선행을 베푼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어 주었습니다.
동정은 누구나 다 느끼고 삽니다.
제사장도 동정을 느꼈고 레위인도 동정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지 재산을 풀어낸 겁니다.
옆집에 누가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 위해서 묵주기도 백번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묵주기도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먹으려고 앉혀 놓은 쌀밥 가져다가
미음 끓여 먹이고 그 사람 살려야 되요.
행동이 따르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입으로만 얼마든지 동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인 이상 어려운 사람 보면 측은지심이 다 있지만 내 것을 쪼개서 내 걸 포기하면서...
내가 쓸 돈을 포기하면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
이게 바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토마스 성인은 믿음은 행동 때문에 완전하게 된다.
오늘 미사 후에라도 내가 찾아갈 사람이 있나 없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반에 아픈 사람, 그 자매.. 마음속으로만 한 번 가 봐야지, 가 봐야지...하면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먼데서 찾지 마십시오.
여러분들 가족들, 친척, 친정아버지, 어머니...한 번 가 봐야지...가 봐야지....하면서 못 가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제의 강론을 통해서, 성체를 통해서
또 하나의 사마리아인이 거듭 나기를 강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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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티 성지 - photo by Y. benedi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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