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슴이 답답해서 -반영억신부-(마태오 18,21―19,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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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1-08-11 | 조회수692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2011년 8월 11일 목요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클라라 성녀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클라라(Clara)는 ‘빛’이라는 뜻인데 성녀의 어머니가 기도 중에 “온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음성을 듣고 그 이름을 지어 주었다. 어릴 적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향을 받은 성녀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부모 몰래 집을 나와 클라라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클라라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철저하게 가난과 겸손의 삶을 살다가 1253년 세상을 떠났으며, 1255년 알렉산데르 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자 여호수아를 따라 요르단 강을 건너간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해 주신 것처럼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도 함께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대 바다를 건너는 것처럼 요르단 강을 건너간다. 새로운 시대가 그들에게 열리기 시작한다(제1독서). 남을 용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삶에 베풀어 주신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깨달을 때 비로소 남을 용서할 수 있다.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만 탈렌트 빚진 사람의 심정으로 주님께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한다(복음).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시며, 무조건적이십니다. 그런데도 마치 조건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죄의 용서에 관한 부분일 것입니다. 가슴이 답답해서 -반영억신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서로 상대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붙어 다니다가도 어느 날 아침 등을 지기도 합니다. 꼭 큰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로도 마음이 멀어집니다. 선한마음과 좋은 관계를 항구하게 지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등을 지는 것은 마음 안에 화를 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두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해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3)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한없이 기꺼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질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과 용서 받은 것을 생각하면 남을 용서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열심히 노력할 것이지만 실수와 잘못의 허물이 없을 만큼 완벽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용서 받고 살아온 죄인이고, 용서받아야 할 아야 할 죄인입니다. 그러니 내가 용서 받기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개와 고양이사이는 적대관계입니다. 그것은 개와 고양이의 행동양식이 정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치켜세우고 흔들어 댑니다. 배를 드러내고 누워 귀염을 떱니다. 그리고 무섭거나 경계할 때는 꼬리를 내리고 으르렁거립니다. 그런데 고양이는 반대로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내립니다. 그리고 무서우면 꼬리를 세웁니다. 배를 드러내고 누우면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시입니다. 개와 고양이의 감정표현이 서로 다르니 개가 좋다고 꼬리를 흔들고 다가가면 고양이는 싸우겠다는 표현으로 입력이 되고, 고양이가 좋다고 꼬리를 내리고 다가가면 개는 사우겠다는 신호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 사이가 앙숙이 되고 만 것은 서로의 의사표시가 다른데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입장과 주장이 상대에게는 전혀 다른 의견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마음과는 달리 미운감정과 분노, 적개심을 키워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이해가 되고 감정을 넘어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회복되기도 합니다. 용서라는 얘기가 나오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에 응어리 진 것이 많은 탓입니다. 억울한 것도 많고 되갚아 주고 싶은 것도 많은데 ‘사랑하라’, ‘용서하라’고 하니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당하고 살아야 하느냐고 항변할 수밖에 없는 이 처지가 싫습니다. 그러나 원수든 친구든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의 이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21) 원수 짓는 것은 마음 안에 불행을 쌓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니 해질 때 까지 성난 채로 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용서한다고 마음먹었다가도 그 때의 상황이 떠오르면서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 미움의 감정이고, 상처 준 사람이 있다면 외면하고 보복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나약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의지적인 노력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까지 하셨습니다.“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그 기도를 우리가 할 때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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