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This is how my heavenly Father will treat each of you
unless you forgive your brother from your heart.
(Mt.18.35)
제1독서 여호수아 3,7-10ㄴ.11.13-17
요즘에 신경 쓸 일들이 좀 많습니다. 7, 8월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는 있지만, 다음 주부터 있을 피정 강의 준비를 하다 보니 신경이 꽤 날카로워진 것 같습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어제는 특별히 집중해서 강의를 준비하자고 다짐했는데, 아침부터 계속해서 저의 리듬을 끊어버리는 전화가 옵니다. 특히 이 전화는 저와 전혀 상관없는 불필요한 전화이기에 점점 화가 나더군요.
대출 전화, 보험 상품 안내 전화, 신용카드 가입 독려 전화, 심지어는 폰팅하자고 유혹하는 어떤 여인의 전화까지 모두 제게 필요 없는 전화였고, 저의 일을 방해하는 전화였습니다. 결국 오후에 받은 보험 상품 안내 전화에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전화를 하느냐고, 나한테는 그 보험이 전혀 필요 없다고,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화를 냈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전화지만, 전화를 건 사람에게 있어서 이 통화는 자기 자신의 생계와 깊은 연관이 되어 있는 중요한 전화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전화를 하는 이 사람을 굳이 미워하고 비판하면 안 되지요.
생각해보니 하루에도 몇 차례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했고 때로는 미워도 했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조금만 상대방의 입장을 바라본다면 판단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을 텐데, 나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미움의 감정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참된 용서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자기만족에서 오는 용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손익계산을 따져보고서 하는 용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참된 용서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횟수인 일곱 번을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하시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무조건 용서하라는 명령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매일같이 죄의 탕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신데, 왜 우리들은 내게 자그마한 잘못을 한 사람을 향해 “나는 너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라고 힘주어 말할까요? 따라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있음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무조건적인 용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용서가 어리석은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내가 약해서 용서하는 것 같고, 내가 바보 같아서 용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용서하면 내가 큰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용서의 길에서 멀어지고만 싶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용서의 삶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용서함을 받기 위해 기도하거나 혹은 남을 용서하는 순간이다.(잔 홀 리히터)
용서와 이해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
어느 날 몸 지체들이 비상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코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여러분 지금처럼 경기가 어려운 때에 우리 중에 혼자 놀고먹는 못된 백수가 한 놈 있습니다. 바로 저하고 제일 가까이 사는 입이라는 놈인데, 그 입은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는 혼자 다하고 먹고 싶은 음식은 혼자 다 먹습니다. 이런 의리 없는 입을 어떻게 할까요?”
그 말에 발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저도 입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 주인이 얼마나 무겁습니까? 그 무거운 몸으로 몸짱 만들겠다고 뛰니 발이 아파 죽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 입이 혼자만 많이 먹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때 손도 말했습니다.
“게다가 입은 건방집니다. 먹을 때 자기 혼자 먹으면 되지 않습니까? 개나 닭을 보세요. 그것들은 스스로 먹을 것을 잘 먹는데, 입은 날 보고 이거 갖다 달라 저거 갖다 달라, 심부름을 시키고 자기만 먹습니다. 정말 메스꺼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비판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합시다. 앞으로는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절대 보지도 말고, 냄새 맡지도 말고 입에게 가져다주지도 맙시다.”
그 제안이 통과되어 즉시 입을 굶기기 시작했습니다. 사흘이 지났습니다. 손과 발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눈은 앞이 가물가물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코는 사방에 풍겨오는 음식 냄새로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조용히 있던 입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러면 우리가 다 죽게 됩니다. 제가 저만 위해 먹습니까? 여러분들을 위해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입술도 깨물고 혀도 깨뭅니다. 그러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서로 협력하며 삽시다.”
그 말에 다른 지체들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예전처럼 자기의 맡은 일을 해서 건강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다양합니다. 재능도 다르고 성품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지요. 그런데 다르다고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와 틀린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사랑과 용서를 하지 못합니다.
이해는 사랑과 용서의 출발점입니다.
‘오(5)해’가 있어도 세 번 자기를 빼고 생각하면 ‘이(2)해’가 된다는 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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