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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812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8-12 조회수310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3-12

그때에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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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이라는 말은 그 다음에 나올 어떤 것을 꼭 하겠다는 의지가 섞여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것을 하겠다,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의 질문은 '어떻게 해서든 남편은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 주제는 무엇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에서는 실제로 있는 법이었습니다. 

바리사이는 이미 정해져 있는 틀을 이용해 예수님을 떠보려 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바리사이가 예수님에 대한 어떤 판단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생각이 율법을 깨뜨리려는 태도로 보였거나 아니면 혼인에 대해 다른 생각을 지닌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의견을 묻거나 가르침을 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각을 내어 놓지 않으십니다. 그가 내민 카드가 모세였다면 예수님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성경을 통해 답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당신 생각에서 나올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말문을 막아 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 성경이 모세의 말을 막은 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예수님의 대답에 당연히 바리사이의 말도 흐름이 바뀝니다. 이젠 그에게 던져진 질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르침 모두를 지켜야 하는 바리사이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들의 모순을 입밖으로 끄집어 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느님의 뜻과 모세의 뜻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바리사이는 방향 없이 이제는 모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런데 왜 그랬느냐고 말입니다. 시비를 걸려고 하다 자기가 내민 질문을 자신도 풀지 못하는 꼴입니다. 그는 정해진 법은 알았지만 그 법이 하느님의 뜻과 맞는지도 생각해보지 못한 셈입니다. 


이제 그는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몰랐던 것에 발목을 잡혔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단호한 답변이 내려집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불순한 생각을 드러내게 하려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완고한 모습,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조차 어기는 자신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맙니다. 하느님의 백성의 전통을 지키는 바리사이는 자신들의 잘못된 모습으로 눈 앞의 하느님을 시험하려 들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리고 덮어버렸던 하느님 말씀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리사이가 묻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확인해주는 이 뜻은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만입니다. 곡해하지 않고 바리사이가 물은 질문 그대로, 이 사람들은 아내를 소유물로 여기고 자신의 의지대로 어떻게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큰일 날 생각이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욕심으로 가려놓고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법을 만들고 살았던 셈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에 아주 재미있는 답을 주십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우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간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표현을 '고자'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말 자체부터 온전치 못한 삶을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것은 불완전한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처음 두 부류는 대단히 불행한 이들이고, 마지막 사람은 그 불행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선택하려는 이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복음의 내용을 한 쪽에선 혼인미사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또 한편으론 동정생활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복음의 배경이 이스라엘의 부끄러운 모습 속에서 드러났다는 것이 속상하기만 합니다. 잘못된 관행으로 하느님 말씀을 공격하려했던 바리사이의 모습과 하느님의 진실 앞에서 자신들 스스로 싫다고 말하려는 제자들 사이에서 외면당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보여 마음이 불편하기만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을 하고 이용을 할 수도 있지만 그 말씀을 고의로 어기고, 싫어하는 모습에 담겨 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생활도 반성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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