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8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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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8-14 | 조회수302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11년 8월 14일 연중 제 20 주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하느님에 대해 세상 어느 누구도 "안다"라고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하느님께서 알려주시고,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면 그 이상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하느님의 얼마만큼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안다"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많은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으로 하느님에 대해 짐작도 해 보고 나름의 질서를 세우고 울타리를 치며 그 안에 사람들을 모아 종교를 만드는 대단한 작업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자 자신들이 선택한 하느님의 가르침을 강조하고 반면 그 울타리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무시하며 공격하는 일도 서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거기에 하느님의 선택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주어지면 그 틀은 전혀 비집고 들어 설 틈 없는 견고한 것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견고한 신앙적 울타리에 던지는 작은 물음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에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오늘 하느님의 백성이 아닌 여인이 사랑하는 딸에 대한 사랑 하나를 들고 하느님 앞에 섭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도 아닌 분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외쳐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여인이기에 그녀에게 하느님은 상관 없는 신의 이름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하느님을 찾습니다. 딸을 살려달라 애원합니다. 그녀는 구원의 공식 밖의 사람입니다. 그녀가 지닌 사랑이라는 말은 하느님과는 상관 없는 말이며 하느님은 그런 이의 청을 들으시지도 보시지도 않으실 분이십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견고한 테두리 안의 하느님의 정의이며 은총이고, 구원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아무런 자격도 상관도 없는 이일 뿐입니다. 사연이 딱하긴 해도 말입니다. 오늘 매정하신 예수님의 언급은 이런 이스라엘의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줍니다. 하느님에 대해 듣고 배운 것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가두고 한정지어 버린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구원에 있어서도 한결같은 선택받은 민족의 전통을 고수합니다. 예수님은 전에 없이 이런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태도를 이 간절한 여인에게 보이십니다. 연극배우처럼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이렇습니다. 처음 그녀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자리에서도 주님은 전혀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들은채도 하지 않으시다가 제자들이 이야기를 드리자 그제야 당신의 소명은 오직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여인이 청하자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을 강아지들로 표현하십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처음부터였던 였습니다. 그 모습에 놀랄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분명한 이스라엘의 기준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자신이 서 있는 이유를 잃었습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이스라엘의 하느님 은총은 그렇게 철저히 여인의 딸을 비켜갑니다. 여인의 마귀 들린 딸은 평생 그리 살아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기에 이 여인은 부스러기를 기다려야 하는 강아지로 취급되었고, 그 이유로 동정이 아닌 버림을 받는 처지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녀를 절망으로 떨어뜨려 버린 것입니다. 단단한 틀 안에서 나오시지 않는 예수님과 이 여인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방인은 하느님의 은총과 상관 없으니 버림 받고, 구원에서 제외된다가 하느님을 아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 상관 없는 가나안 여인이 일어섭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짐승으로 불리는 순간 이 여인은 스스로를 그 짐승이라 말하며 주님 앞에 일어선 것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소녀의 어머니가 강아지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이 여인은 이스라엘이 쌓은 그 두텁고 어려운 벽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하느님 은총에 가능해진 모습이 되어있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모습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것에 장벽이 없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말에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하는 입장이 변하시고 맙니다. 이 여인은 어느새 식탁 아래에 강아지가 되어 부스러기처럼 떨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을 직접 기다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비참하고 비굴한 모습으로 인정을 하면서도 딸을 구하고 싶은 어머니의 모습에 어떤 장애도 사라지고 맙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그대로 자신을 인정한 여인은 그렇게 딸을 구해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이란 딸을 살리가 위해 기꺼이 강아지가 됨도 마다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강아지가 되면서 부스라기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녀의 눈 앞에는 이제 이스라엘 사람을 가려내시는 하느님이 아닌 딸에게 필요한 은총을 나누어주실 분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에게 주어진 은총은 이스라엘 사람이어서 베푸시는 은총이 아닙니다. 자격으로서 받은 은총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스스로 무너지고 사라지면서 얻은 하느님의 유일한 은총입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딸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여 하느님의 선택이 아닌 하느님께 사랑을 보여 얻은 은총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게 이 여인에게 내려진 은총은 하느님의 선택과 축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하느님 앞에 드러낸 사랑으로 얻은 은총이됩니다. 주님 앞에 선 여인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쌓은 견고한 틀이 아니라도 하느님의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사랑은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들만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이들에게 언제나 열릴 수 있다는 근거 또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가 쌓아놓은 많은 규칙들, 그리고 그를 통해 만나는 하느님과 그분의 능력과 은총들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이야기 하나에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 앞에서의 조건, 자격, 준비가 유일함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한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각자의 기준으로 벽을 쌓아올리는 분열의 시대에 이 여인의 이야기가 참 가르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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