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8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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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8-16 | 조회수352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11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23-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언젠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한 청년이 물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게 나쁜 겁니까?" "부자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럼, 전 부자부터 되고 싶습니다." 부자는 어느새 사람들의 목표가 되어 있습니다. 부자라는 말은 돈과 재물이 많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으로 사회 안에서의 지위나 수준 등을 말합니다. 또한 결국은 재물을 기반으로 한 부자가 되는 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삶의 내용이나 방향을 고민하는 젊은이들은 줄어들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든 것에서 재물을 가져서 어느 정도 위치를 만드는 것을 바라고 노력하는 세상입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우선 많이 가져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의 의미는 상실됩니다. 아껴쓰는 식의 방법은 옛말이고, 이젠 어떻게든 많이 벌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살아감에 있어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은 옛말이며 같은 말을 쓰면서도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하는 것에 집중하는 세상입니다. 또한 부자는 한 편으론 많은 돈을 쓸 정도의 수준을 갖춰야 하는데, 개인적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기준을 유지해야 부자라 할 수 있으므로 모은 것을 마음대로 쓸 수도, 써서도 안된다는 한계에 걸려듭니다. 결국 모은 것은 유지를 해야 하고, 쓰고 싶으면 더 모아야 하는 처지에 빠져듭니다. 당연히 쓸 돈은 없고, 더 모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더 모은다는 것이 나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더 모으면 더 부자가 되고, 그것은 부자 안에서도 서열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재물이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면 그 재물의 많음이 목표가 되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더 차원이 높은 '부자'를 향해 애를 써야 합니다. 늘 허기지고, 부족하며, 더 독해지고, 더 강해져야 합니다. 한정된 재물을 더 가져야 한다는 것은 사람을 독하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보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면 그 독으로 악을 써야 합니다. 자신이 원래 어떤 사람인지를 자신은 알고 있다지만 드러나는 모든 상황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본인도 아닌 상태로 독하고, 악하게 살아가는 자신과 함께 죄와 상처를 경험하게 됩니다. 물론 당사자는 더 모으면 그런 것 안봐도 되는 상태가 된다고 믿고 지독히 살아가게 됩니다. 부자가 된다는 것이 많은 재물을 가졌다는 현재 상태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상황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어떤 이유로든 쓴다면 그는 부자라는 이야기를 잃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부자의 상태가 되기 위해 달리고, 애를 씁니다. 상태가 아니라 목표가 되어 버린 것이고, 사람들은 이것을 이루지 못했다 하여 늘 부족하다 말하고 행복하려 애를 쓴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부자에게 하늘 나라는 어떤 의미일까요? 하늘 나라에서는 가진다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는 것이 없는 곳, 그리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전부인 세상은 부자를 바라는 이들이 꿈꾸는 이상에는 전혀 흥미가 없습니다. 교회에 기여하고 하느님께 은총을 받고, 부자로서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것을 적당히 나누며 칭찬을 듣는 일은 참 좋지만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생각하는 것 자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물질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자신의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하느님이 만드셨다고 말할 때 이미 내 손에 쥔 것은 세상이 말하는 내가 가진 것과 더불어 판단되는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어 놓지 않아도 그것을 쥐기 전 부터 이미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것으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내어 놓고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이것은 원래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일 뿐이며 그것이 자랑일 수는 없습니다. 여유있게 사는 사람으로서 손해가 될 일임에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 놓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을 살면서 지극히 당연한 행동입니다. 그런 신앙을 부자가 목표인 사람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 조차 되질 않습니다. 더 큰 것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면 하느님께 내어 놓는 것은 가진 것을 무너뜨리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일 뿐입니다. 하늘 나라는 부자가 꿈꾸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평생을 모은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일인데 생각이나 할 수있겠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예수님의 말씀은 경고가 아니라 있는 어느 시대이건 현실입니다. 또한 당연한 이치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운 이유는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더욱 큰 재물을 향해 달려가고 그것이 하느님 나라라고 말해주지 않는 이상 부자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행동입니다. 낙타는 어떻게든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가려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노력하지만 이유도 없는데 부자가 왜 하느님 나라를 궁금해하겠습니까? 아마 열려 있어도 닫힌 듯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문이 아무리 넓어도 부자에겐 등을 돌려야 할 세상이 하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자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늘나라의 가치를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길 원하는데 모든 것을 다 가진 부자조차 하늘 나라가 어렵다면 사람들은 희망이 있겠는가 생각합니다. 하늘나라 조차 그들에겐 재물로 꾸며진 최상의 조건의 영원한 생명이라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불가능하다는 여겨지는 세상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사람의 의지로 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닌 하늘나라. 그 나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바늘 구멍같은 하늘나라의 문이라도 하느님이 여시면 누구나 들어갈 수있는 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기준이 문에 들어서는 자격이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이나 생각은 이 문을 여는 열쇠일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부자되기를 포기해버립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주고 받은 말에서 혹시나 제자들이 가진 것을 주님께 내어 놓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주님 역시 버렸다는 표현을 쓰십니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한 포기가 부자를 포기하는 모습입니다. 이것 조차 주님께 내어 놓았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그것조차 부자의 판단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은 모든 것에 대한 소유를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버려 백배로 받는 것, 그리고 영원한 생명도 누리는 방법입니다. 이것조차 투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버리는 것으로 그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보상을 바라고 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을 모를리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무엇하나 주시겠습니까? 만약에도 그렇다면 그는 하늘 나라에서조차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일 겁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세상은 처음부터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가지는 것보다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가 부자라면 부자로서 사십시오. 가난하다면 가난한대로 사십시오. 중요한 것은 상태가 아니라 그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 우리를 나누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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