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8월18일(목) 聖女 헬레나 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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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병찬 | 작성일2011-08-18 | 조회수224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St. Helena - CIMA da Conegliano. 1495.Panel.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축일:8월18일 성녀 헬레나 황후 ST. HELENA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브리텐 출신이라고 하나, 그녀는 소아시아의 드레파눔에서 250년경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 그녀는 270년경에 로마의 장군인 콘스탄씨우스 클로루스를 만났는데, 그녀의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였다. 그들 사이에 콘스탄틴이 태어났는데, 293년에 체살이 되었다. 그러나 남편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헬레나와 이혼하고 막시미안의 의붓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하였다. 막시미안이 사망하자, 그의 취하 군인들이 콘스탄틴을 황제로 모셨고, 그는 그의 어머니께 아우구스따라는 칭호를 드렸다.
헬레나가 언제 크리스챤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녀의 노력으로 밀라노 칙령을 반포케 하여 로마 제국 내에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투옥된 모든 신자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그후에 성녀는 많은 성당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으며 오랜동안 성지에서 살았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때문에 그녀의 문장은 십자가이다. 그녀는 아마도 니코메디아에서 사망한 듯 보이며, 콘스탄티노블에 안장되었다.
*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 San Costantino Imperatore 축일:5월21일,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Constantine the Great and St. Helena
성녀 헬레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한 사람으로 전해 오는데 그보다는 어쩌면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들의 수호 성인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관집 딸이었던 헬레나는 로마 장군 콘스탄티노 클로루스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노 대제이다. 그러나 남편은 얼마 후 헬레나와 이혼하고 로마 황제 막시미아노의 수양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세상에서 불공평하고 불행한 일들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 클로루스는 비록 황제의 수양딸과 결혼할 기회가 있다고 할지라도 조강지처를 저버리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착한 일을 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거나, 악한 일을 하라는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 반드시 죄를 짓게 된다. 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들을 책임이 있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홈에서.www.ofmconv.or.kr)
*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14일.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로마 제국이 비로소 가톨릭에 자유를 준 것은 저 유명한 콘스탄티노 대제인데, 그때까지 300년 동안 계속된 박해에서 흔연히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무수한 신자들의 용감성과 또 그들의 평상시의 훌륭한 행동은 아울러 뜻있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디오나 어머니 헬레나도 그러한 감화를 받아 은연중 가톨릭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헬레나는 곧 세례를 받고 후세에 성녀로서의 존경을 받을만한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그녀가 태어난 해는 확실치 않으나 대개 250년 전후로 추측된다. 그녀의 아들인 콘스탄티노가 274년 2월 17일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향은 소아시아의 비치니아 주에 있는 드레파눔이라는 곳이었으며 그녀의 양친은 명문의 집안도 아니고 재산도 넉넉하지 못했으므로 헬레나도 손수 벌어서 먹고사는 법을 강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래 미모에다 아름다운 마음씨의 소유자였으므로 마침 그곳에 배속 근부 중인 로마의 장교 콘스탄티오 클로루스의 눈에 들게되어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초산(初産)을 한 곳은 나이수스라고 하는 지금의 닛슈 시(세르비아 영내에 있다)이며 그 아기의 이름이 곧 콘스탄티노였다.
The Vision of Saint Helena - VERONESE, Paolo c. 1580.Oil on canvas,Pinacoteca, Vatican
콘스탄티노는 작은 콘스탄티오라는 뜻이다. 그러는 동안 남편인 콘스탄티오는 차차 승진해 막시미아노 황제의 중신이 되고 부하들의 신망도 컸으므로, 곧 로마 제국 서부의 총독으로서 갈리아 지방, 즉 프랑스와 남독일, 스페인, 브리타니아 등 온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조건이 있었다. 즉 먼저 그의 부인인 헬레나를 버리고 막시미아노의 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할 것과, 다음은 그 아들인 콘스탄티노를 볼모로서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에 있는 리지니오의 저택에 남겨 둔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오는 그런 무리한 요구에 처음에는 응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의 복받치는 야심은 마침내 부인을 희생시키려고 결심했다. 때는 292년의 일이었다.
헬레나는 억울한 마음을 억제하며 비참히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 아들 콘스탄티노는 인질로서 소아시아를 향해 떠나게 되어 서로 이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콘스탄티오는 자기 야망대로 서 로마 지역의 총독이 되었으나, 역시 사람은 죽을 때엔 본심이 돌아오는 법이다. 그가 중병에 걸려 눕게 되자 그 아들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을 소환하려 했는데, 이것을 안 동 로마의 총독 리지니오는 콘스탄티노를 독살하려 했다. 겨우 난을 면해 아버지를 찾아간 콘스탄티노는 306년 아버지의 별세와 더불어 군부의 지시를 받아 그 후계 총독이 되었다.
그는 즉시 어머니 헬레나를 독일의 트리엘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모시고 가서 아버지가 약탈한 그녀의 지위와 권리를 복구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가 저 유명한 미르비오교(橋)의 전쟁에서 대승리를 얻자 곧 서 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추대를 받고 로마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그는 어머니 헬레나에게 왕대비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보내고 아울러 조폐권(造幣權)을 주고 어머니 고향인 드레파눔을 개조, 미화해 이를 헬레노폴리스 즉 헬레나의 시(市)라 개칭하여 영원히 그녀의 이름을 기념케 했다.
그러나 전에 세상의 쓴맛을 다 맛본 헬레나인지라, 연기와 같이 허무한 세상의 영화에 마음을 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영원불멸의 행복을 말하는 가톨릭에 더욱 마음이 끌리어 마침내 60세에 이르렀을 때에 자진하여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초대 교회의 유명한 역사가인 에우세비오는 그녀를 평해 말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같이 그녀의 신앙은 견고하고 열의는 뛰어났다”고 했다.
당시 헬레나의 몸은 왕대비라는 높은 지위에 있고 또한 조폐권까지 가지고 있어 그녀의 부유함은 비할 데가 없었으나, 그녀는 빈민에게 희사하거나 성당 건축을 위한 것이라면 한 푼도 아끼지 않고 모든 원조를 제공했으며, 자기의 존귀한 신분을 잊고 천한 사람들과 함께 예식에 참여도 하고,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콘스탄티노 황제는 그 후 자기의 기념 도시인 동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폴리스, 콘스탄티노의 도시라는 뜻이다)을 그 수도로 정했다.
헬레나는 예수께서 일생을 지내신 팔레스티나 지방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살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또한 그녀의 유일한 소망인 성지 순례를 마침내 326년에 이루었다. 그때 교회의 원수들은 옛날의 성스러운 유물을 없애기 위해 갈바리아 산상에 세워졌던 주님의 십자가를 어딘가로 치워 버리고 그 대신 그 곳에다 베누스 여신의 동상을 세워 놓았었다. 헬레나는 여러 곳을 발굴해 고생 끝에 겨우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그녀의 문장은 십자가이다.
헬레나는 또다시 주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과 주님의 승천지인 올리브 동산에 기념 성당을 건축하고 많은 유물을 모시고 콘스탄티노플에 귀환했으나 얼마 후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80세였다. 그녀의 상본은 보통 머리에 아름다운 관을 쓰고 화려한 복장에 망토를 두르고 위엄을 갖춘 왕대비의 복장으로 십자가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다.
밀라노칙령 Edictum Mediolanense
313년 2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치니우스(Licinius)가 밀라노에서 회담하고 6월에 발표한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고, 그리스도 교인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은 폐지되었다. 이 칙령은 리치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us Daza)를 무찌른 후 오리엔트 총독에게 보내 <박해자의 죽음에 대하여> (De mortibus persecutorum, 348)란 서한 속에 실려 있었고, 이것이 다시 락탄시오(Lactantius)와 에우세비오(Eusebius)에 의해 인용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밀라노칙령은 양 황제의 의견차로 인하여 밀라노에서 공포되지 못하였고, 칙령이라기보다는 동방지역의 총독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형식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콘스탄티누스 대제 San Costantino Imperatore 축일:5월21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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