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혼자서 식당의 한편 구석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마침 오늘 점심에는 내가 좋아하는 토마토가 나와서 먼저 그 토마토를 한 입 베어 먹으며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때 마침 필리핀 수녀님 한 분이 내 곁을 지나가다가 내게 물었다.
"토마토에 소금을 뿌리지 않고 그냥 먹어도 맛있어요? 소금 줄까요?"
"토마토에 소금을요? 저는 그냥 먹어요. 설탕이라면 혹 모를까......"
그랬더니 그 수녀님이 배꼽을 잡고 웃으며 하는 말, "최신부는 항상 농담도 잘 해요."
야채에 항상 올리브 기름과 소금을 뿌려 먹는 이 곳의 음식 문화로는 토마토에 설탕이라는 말 자체가 자연스럽게 농담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토마토를 야채가 아니라 과일로 대접하며 단 맛을 즐기는 우리네 식습관으로는 토마토에 소금이라는 말이 또한 의아하게 들린다.
토마토에는 소금을 뿌려 먹어야 할까? 아니면 설탕을 뿌려 먹어야 할까?
어느 것이 맞을까? 가장 우스운 것은 바로 이 질문 자체이다.
이것은 어느 것이 맞고 틀리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서로 다를 뿐이다. 서로 다를 뿐이기 때문에 굳이 답을 말해야 한다면 둘 다 옳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렇듯 음식 문화를 포함한 모든 문화에 관한 문제들은 절대적인 기준이 없이 서로 상대적이다. 어느 일방이 다른 쪽을 향해서 '왜 이렇게 하지 않고 그렇게 하느냐'고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내것과 다른 상대방의 문화에 대해 항상 개방된 자세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그렇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적인 본성과 또 그 동안 각자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아오면서 형성시켜온 성향, 기호 그리고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들 역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기와는 다르게 말하거나 행동한다고 해서 자기의 주관대로 판단하거나, 그릇된 판단을 바탕으로 남에게 험담을 늘어놓거나, 또 섣불리 충고한답시고 덤벼들어서는 낭패를 보기 쉽상이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충고를 한다는 것은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다. 충고를 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주관적 판단이 작용해서는 안되며 항상 충분한 객관성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 해도 상대방에게는 "왜 너는 나처럼 말라고 행동하지 않는거야?"라는 말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이런 충고는 관계에 있어서 매우 위험하게 작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공동선을 형성해 나가는데 심각한 장애를 가져온다거나 나의 삶에 실제적인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우선 우리가 해야 할일은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기원전의 어느 고대 그리스 철인이 말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목욕을 빨리 끝내거든 '그 사람은 목욕을 빨리 한다'라고까지만 판단하고 말하라"
세상은 참으로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다. 하지만 우리가 60억이 넘는 사람들 모두를 이해하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다. 그 중 우리가 지금 당장 관계하고 있는 몇명의 가족과 더불어 수 십, 혹은 수 백명의 이웃들을 잘 이해하고 살아가면 된다.
그 사람들이 토마토에 소금을 뿌려 먹든지 설탕을 뿌려 먹든지 아니면 그냥 먹든지 일부러 애써서 분석하고 판단하고 충고하려 들지 마라.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획일적인 기계가 아닌 각기 다른 하느님의 아름다운 작품임을 먼저 감사해야 한다.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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