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덥지요? 더위가 언제까지 간다고 그래요?
그건 하느님만 아시겠죠?
일본에서 한 일주일 있다가 왔는데 일본도 무지하게 더워요.
41도 42도.... 여기 오니까 겨울 같애.
42도 넘어가는데서 살다가 오니까~~
여러분들 그 얘기 아십니까?
우스갯소린데......
아주 못되게 살던 사람이 있었어요.
못되게 살았으니까 죽어서 어디에 갔겠어요?
천당에 갈리는 없잖아요.
연옥에 가기에도 시원찮아서 당연히 지옥으로 갔죠.
지옥에 가서 들어가 보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보이는데
세상에 딱 보니까 친구 한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친구는 자기와는 전혀 다르게 살았던 사람이예요.
그 본당에서 총회장을 10년씩이나 하고 순교자 후손이고,
아. 그런데 그 친구가 지옥에 있는 거예요.
자기는 냉담을 수십 년 동안 하면서 못된 짓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지옥에 온 것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이 없었는데
아니 그 열심한 친구가 지옥에 와있는 것을 보고서는
“아니 이 사람아~ 나야 여기 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자네가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얘길 하니까
그 친구가 “이 사람아, 조용히 좀 해 옆방에 신부님 와 계셔. 이층에는 주교님도 계시고....”
신분에 관계없이, 나이에 관계없이, 유니폼에 관계없이 영적으로 나태함에 빠지면 어디 갑니까?
지옥에 떨어집니다.
사제복만 입고 다닌다고 해서 결코 사제는 아닙니다.
옷 속의 인간이 더 중요하지요.
수도복 입고 한평생을 살았다고 해서 그 옷 입었다는 하나 가지고
주님이 천당 문을 열어놓을 것인가?
그건 아닐 겁니다.
긴장하지 않으면 사제도, 수도자도, 주교도 교황도 영적인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천국문은 좁다>
천국문이 아무리 좁아도 열심히 잘사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맞죠?
아무리 입학시험이 어려운 학교라 할지라도 시험공부 열심히 한 사람들에게는 그 입학시험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좁은 문은 준비 안 된 사람들에게 어려운 문입니다.
엉망진창으로 산 사람에게 어려운 문이 좁은 문입니다.
교회는 가르칩니다.
좁은 문을 어떻게 들어가야 되는지를.....
사제들이 미사 때마다 가르치고 그것도 모자라서 유명한 선생님을 불러다가 피정도 시키고 또 그것도 모자라서 세미나도 열고 꾸르실료도 보내고 ME도 갔다 오게 하고....
<천국 문 들어가기 위해서 ‘이렇게 살아야한다.>
교회의 사제들이 최선을 다해서 신자들을 천국문 안으로 밀어 집어넣기 위해 그 방법을 가르칩니다.
여러분들이 세례 받고 지금까지 주일마다 피정을 통해서 무수하게 들은 그 아름다운 말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하는 그 많은 말들...
귀에 아마 딱지가 앉도록 들으셨을 겁니다.
그 많은 말을 듣고도 여러분들은 얼마나 변화가 되었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첫 단추를 교회에서는
<올바른 영적예배를 드려야 된다.>하고 가르칩니다.
올바른 영적예배가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단추다.
신약과 구약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천국에 첫발을 내딛는 첫 단추는
첫 번째. 살아있는 재물을 바쳐야 야된다.
두 번째, 흠집이 없는 재물을 바쳐야 된다.
세 번째, 직접예물을 들고 와야 된다.
이 세 가지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지면 절대 좁은 천국 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첫 번째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살아있는 재물을 바쳐라.>
구약의 제사장들은 죽은 비둘기는 받지 않았습니다. 피가 돌고 있는 짐승만 제대 앞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죽은 염소는 받지 않았습니다.
신약적인 의미로 살아있는 예물이라고 하는 건 뭘 뜻합니까?
살아있는 미사를 뜻합니다.
미사를 드리면서도 사제도 그냥 입에서 앵무새 하듯이 경문을 읽고
준비 안 된 강론을 가지고 나와 가지고 지도 못 알아듣는 얘길 떠들고 신자들은 앉아서 화만 푹푹 내고
‘저것도 강론이야? 신부님 기도 안 해.’
그런 경직된 미사에 무슨 성령이 내리겠는가?
사제와 평신도들이 같이 한마음이 되어서 드리는 살아있는 미사!
아름다운 전례!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겁니다.
미사 한 시간 내내 여러분들의 얼굴은 제대 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 순간에도 머릿속은 딴 데를 돌아다니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이 순간에도 이 무거운 눈꺼풀 이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게 눈꺼풀이죠.
네, 여섯 분이 졸고 계십니다.
그래요. 졸라고 내버려두세요.
성모님 품안에서 자는데 어떻습니까?
콩나물 기를 때 물을 붓지요?
그러면 물이 밑으로 빠지지요?
그래도 콩나물은 커요? 안 커요? 크지요.
어, 오늘 이곳에서 졸지만.... 크긴 다 클 거예요.
살아있는 봉사가 있습니다.
남을 의식하는 봉사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사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희생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희생입니다.
이런 살아있는 재물을 하느님은 받으신다는 겁니다.
두 번째, 흠집이 없는 재물을 받으신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비둘기 발톱이 빠져있으면 퇴짜,
염소의 뿔에 금이 가있으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약적인 의미로 흠집이 없는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뭘 뜻합니까?
성사 생활 안에서 온전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 양심에 우리 영혼에 흠집이 생깁니다.
죄의식이라고 하는 흠집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교우들이 제단 앞에 성체를 영하러 나오기 전에 그 영혼 안에 있는 흠집을 지우기 위해 미사 전에 고백소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제발 니 영혼 안에 있는 그 불편한 거 빨리 해결하여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 앞으로 나와라.’
성사를 통해서 깨끗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교회는 온갖 배려를 다 합니다.
따라서 흠집이 없는 제물을 바친다고 하는 것은 늘 깨끗한 마음으로 고백성사 성실히 보는 겁니다.
두 번째로 흠집이 없는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우러나는 봉헌을 해야 한다.’는 그 뜻일 겁니다.
‘심는 데로 거두리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느님 앞에 봉헌을 합니다.
주일마다 헌금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신자들의 의무인 교무금을 봉헌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교무금을 봉헌하는 사람이 50%가 안 됩니다.
50%는 엉터리입니다.
아무런 봉헌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몸이 아프면 보약을 사먹고
또 휴가철이 되면 많은 돈을 써서 자기의 삶을 즐깁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봉헌하는 흠집이 없는 이 제물을 바치는데 우리들은 얼마나 인색한가?
정말 마음에 우러나는 봉헌이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
가난한 과부는 그날 저녁 먹을 양식을 헌금 통에 넣습니다.
아주 작은 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대에 앉으셨다가 그것을 보고
‘아 저 과부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봉헌했다.’
그러면 그날 저녁에 그 과부를 굶어죽게 주님이 내버려두셨겠습니까?
다른 축복을 엄청나게 주셨을 겁니다.
흠집이 없는 제물을 바치는 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신다!
세 번째, 좁은 천국 문을 들어가는 세 번째 단추는 직접 예물을 들고 제단 앞으로 나와야 됩니다.
냉담자들에게 물어보면 ‘저 주님 믿습니다. 아직 때가 안됐습니다. 언젠가 나갈 겁니다.’
냉담자들이 아무리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 합리화를 시키는 겁니다.
직접 예물을 들고 이 성전 안에 들어와야 됩니다.
제주노릇을 해야 됩니다.
제주는 미사 드리는 사제만이 제주가 아니라 여기 있는 교우들이 다 같은 제주들입니다.
냉담 하는 남편이 아내가 성당에 갈 때,
“야, 너 나대신 헌금 좀 갖다내라.”
아내가 남편을 대신해서 헌금을 냅니다.
그 헌금 하느님이 받느냐? 안 받습니다.
본인이 직접 들고 들어오지 않는 예물은 받질 않습니다.
아내의 손에 돈 백만 원을 집어서 헌금을 해라...해도 하느님은 받지 않습니다.
물론 저는 받습니다.^^
돈 주는데 왜 안 받습니까?
저는 칼같이 받지만 하느님은 안 받습니다.
그 주인이 직접 들고 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살아있는 제물을 바쳐야 되고 흠집이 없는 제물을 바쳐야 되고
직접 본인이 제주노릇을 해야 됩니다.
아버지 생신인데 가기가 싫으니까 아내한테만 얘기합니다.
“너 가서 생일 좀 차려드려. 나 찾으면 해외 출장 갔다 그래.”
그리고 지는 골프가방 메고 운동하러갑니다.
고런 자식을 후레자식이라고 그럽니다.
신앙적으로도 후레자식 많습니다.
일요일 날도 즐길 것 다 즐기고 세상 비즈니스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거는 신앙생활은 취미생활 정도지 훨씬 더 세속생활이 중요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희생이 있어야함을 모릅니다.
공부를 안 하고 컨닝해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천국은 컨닝해서, 로비해서, 돈 써서 요행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학력위조 사건이 지금 사회문제로 대두가 되고 있습니다.
학력지상주의 나라다 보니까 박사도 거짓이고.. 돈으로 사서
이 세상 폼 나게 살기 위해 학력까지 위조해서 그렇게 살았다할지라도 들통이 날진데 하느님 앞에 가는 천국을 갈 때, 요행이래든지 컨닝 이래든지 돈을 주어서 갈 재간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문이 좁다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천국은 선택만 받았다 고해서 가는 곳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선택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실히 응답해야 됩니다.
응답이라고 하는 말은 열매를 맺어야한다는 그 뜻일 겁니다.
그래서 선택만 받았다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응답을 해야 가는 것이다.
먼저 불리웠다고 해서/ 세례 받은 지 오래되었다고 해서/ 구교라고 해서/ 순교자의 후손이라고 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구체적으로 변화되고 열매를 맺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퇴보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서있고 정지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본인 자신은 작년과 지금이 신앙생활이 똑같은 걸로 착각하지만
천만에~~ 그것은 뒤로 벌써 퇴보를 한 겁니다.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퇴보... 두 가지만 있기에 등산하는 사람과 같이 정상을 향해서 전진해야 됩니다.
그 다음으로 오늘 성서에서는
<이 세상에서 천국을 발견 못하면 죽어서도 천국을 못 간다.>
하느님은 맛보기로 이 세상을 살면서도 천국과 연옥과 지옥에 맛을 느끼게 해줍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도 ‘아! 이게 천국이겠구나!’
‘이게 연옥이겠구나!’
‘이게 지옥이겠구나! ’라는 거를 체험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수십 번씩 천국도 되고, 연옥도 되고, 지옥도 됩니다.
가족끼리도 마찬가집니다.
지옥에 떨어져있는 자기의 모습을 거울을 한 번 보십시오.
속에서 분노가 일어나고 미움이 일어나고 저주가 일어났을 때 거울 앞에서 자기 얼굴을 보면 마귀새끼지 사람얼굴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한 마음을 갖고 착한 마음을 갖고 이쁘게 살 때 거울 앞에 서면
‘참 내 얼굴이 평화스러워 보이고 아름다워 보인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천국과 연옥과 지옥의 맛을 여러 삶을 통해서 느끼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나중에 죽어서 ‘천국이 이렇게 좋은 건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살걸요.’
‘지옥이 이렇게 괴로운 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살걸요.’
요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단 미리 맛을 봐줬기 때문에 그렇지요?
천국을 가기위한 천국 八言이 있습니다.
이 天國八言이 내 혓바닥을 통해서 죽을 때까지 나온다면 그 사람은 천국을 갈 수 있다고 그럽니다.
첫 번째, 감사합니다.
두 번째, 미안합니다. 이것은 겸손의 덕을 표시합니다.
세 번째, 훌륭하십니다. 칭찬을 얘길 합니다.
네 번째, 괜찮습니다. 관용을 얘기합니다.
다섯 번째, 잘하셨습니다. 이해를 뜻합니다.
여섯 번째, 수고하셨습니다. 위로를 뜻합니다.
일곱 번째, 행복합니다. 축복을 인정하는 태돕니다.
여덟 번째, 사랑합니다. 애덕을 뜻합니다.
이 작은 혓바닥에서 이 천국 팔 언의 말이 폭포수처럼 나온다면
그 사람은 이미 천국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일겁니다.
아무리 천국 문이 좁다하더라도 천국팔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천국이 이미 와있는 사람입니다.
한평생을 아주 화려하게 살던 자매가 있었습니다.
온 몸에는 보석을 치렁치렁 늘이고 다니고 백 몇 평짜리 수십억짜리 집에 살았지만 남에게는 자선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도 베푼 적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나 혼자 잘살면 된다하는 그 자매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니까 수호천사가 자기가 살집을 데리고 가는데 아주 호화스럽게 생긴 집 앞을 지나가길래 ‘아! 이집이 내 집이겠거니....’ 했는데 그냥 휙 지나갑니다.
집은 점점 작아졌습니다.
아니 어디까지 나를 끌고 갈 건가?
나중에 가니까는 돼지우리같이 나뭇데기 몇 개만으로 그늘만 가려놓은 돼지우리 같은데다가 세워놓더니
“이집이 당신이 살 집이요.”
“아니 천사님 사람알기를 어떻게 아는 거냐? 내가 백 몇 평짜리 집에 살던 사람인데 이게 돼지우리고 개집이지 내가 여기서 삽니까?”
천사가 하는 말
“수호천사들은 자기가 보호했던 그 사람이 올려 보내는 재료를 가지고 집을 지을 뿐입니다. 자매는 한평생 집지을 재료를 하나도 올려 보낸 적이 없습니다. 이 나뭇대기 몇 개도 내가 옆집에서 사정해서 얻어다가 이렇게 그늘 만들어준 거지 당신은 한 번도 하늘에 지을 재료를 올려보낸 적이 없어. 잔말 말고 자빠져 자”
수호천사가 그 안으로 엉덩이를 차서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 천국에 영원히 살 집을 짓기 위해서 비록 지금 이 세상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성모님께 의지하고 기도로써 열심히 살아갑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