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명의 말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고찬근 루카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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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권영화 | 작성일2011-08-21 | 조회수31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예수님이 하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참 중요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고 그저 '주님, 주님'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맹신(盲信)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따라 신앙인의 유형을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유형은 자기 과신형입니다. 자기가 이 세상 누구보다 항상 잘할 수 있다고 나서면서 그 어려운 대통령 자리도 바로 자기가 적임자라고 생각하는 무모한 유형입니다. 결국은 책임을 지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하느님도 이름뿐이며 혹 필요하다면 자기 비서 정도로 여깁니다. 둘째 유형은 자기 비하형인데 문제가 더 큽니다. 자기 자신을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여김으로써 책임과 의무도 작게 하는 소심한 유형입니다. 늘 익명 속에 안주하고 중립을 선호하는 이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자기를 숨기고, 자기 삶 속에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에게 하느님은 걸림돌이고 두려운 심판자입니다. 셋째 유형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그에 따른 의무를 다하는 겸손한 유형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도 제대로 압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충실히 살아가는 이 사람에게 하느님은 고향이며, 목적이며, 구원입니다.
우리는 어느 유형의 신앙인입니까?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는 위의 유형을 다 거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팔뚝과 그물과 배만을 믿고 살던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분이 두려워 자기에게서 떠나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여 교회의 반석이 된다는 영광스런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 고백이 끝나자마자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통과 수난을 예고하시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리다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이라는 욕을 먹습니다. 어떤 높은 산에서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초막을 짓고 눌러앉아 살자고 조르다 망신당하고, 한번은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폭력을 휘둘러 사람의 귀를 잘랐다가 야단맞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을 한 그날 밤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느님께 맹세까지 합니다. 엉엉 울며 후회한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세 번씩이나 사랑다짐을 다시 해야 했습니다. 이런 무지와 오해, 회의와 갈등의 여정이 끝나고 나서야 베드로 사도는 비로소 진정한 교회의 반석이 됩니다.
이처럼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 안에서 울고 웃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숙되어 갔습니다. 우리도 베드로 사도처럼 믿음도 부족하고, 실천도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늘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세상의 어려움과 신앙의 갈등을 겪어낸다면, 언젠가는 하늘나라 열쇠를 손에 쥐고 믿음의 반석 위에 서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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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며 지성소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16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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