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한 일본인 포로수용소장이 포로들에 대한 가혹 행위 혐의로 전범 재판소에 서게 됐다. 당시 수용되어 있던 미군 포로들에 의하면 그 수용소에서는 검은 종이를 강제로 먹이는 고문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 누구라도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수용소측에서 포로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뤘다고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 수용소장은 무죄로 풀려났다. 왜냐하면 미군 포로들이 증언한 그 ‘검은 종이’란 바로 일본인들의 일상음식중 하나인 ‘김’이었기 때문이다.
‘검은 종이’와 ‘김’...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득 우리들의 타인에 대한 ‘충고’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생활 중에 자주 다른 사람들에게 ‘충고’를 건네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충고’를 받는다. 사실 충고(忠告)라는 사전적 의미는 '허물이나 결점 따위를 고치도록 타이름, 또는 그 말'로서 더 없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이 생활 속에 교환하는 그 수많은 충고들이 실제로 얼마만큼 효과를 거두는지에 대해서 나는 다소 부정적인 편이다. 그것은 다음의 간단한 세 가지, 우리들의 진정한 충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다.
첫째, 내 안에서조차 최종적으로 건네지는 그것이 ‘김’이라는 확신도 서기도 전에 감정이 앞서 불쑥 건네는 경우 상대방은 대부분의 경우 ‘검은 종이’로 받아들인다. 충고는 신중에 신중을 기울인 다음 그러고도 조심스럽게 상황과 시간을 봐서 건네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충고는 타이밍을 놓치는 것이 섣부른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둘째, 나는 아무리 충분하게 숙고를 하고 상대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충심으로 조심스럽게 ‘김’을 건넸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검은 종이’로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서로 허물없이 충고를 주고받을 만큼 아주 가까운 관계가 아닌 사이에서의 충고는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키기 일쑤다. 조금이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 관계라면 차라리 결과를 함께 기다리는 인내가 상대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셋째, 결론적으로 우리들 대부분은 상대에게, 또는 상대로부터 ‘김’을 ‘김’으로서 주고받을 만큼 충분히 인격적으로 성숙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충고를 남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충고를 건네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를 갈고 닦는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
충고는 ‘나’를 다듬음으로서 ‘너’를 세울 수 있고, 또한 ‘너’를 받아들임으로서 ‘나’를 완성시킬 수 있는 인간관계의 가장 아름다운 예술적 표현이다. 진정한 충고자가 되기란 진정한 예술가가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김’과 ‘검은 종이’는 분명 하나를 말하는 것이었지만 서로 다른 입장에서는 ‘삶’과 ‘죽음’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어느 수녀님이 정성을 담아 보내 주셨을 '김'을 아무런 수고없이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먹으며 생각해 본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우리는 성숙한 지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히브6,3.)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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