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22주일 2011년 8월 2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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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8-26 | 조회수491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연중 제22주일 2011년 8월 28일
마태 16, 21-2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고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서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을 말립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돌아가셔서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다 알고 계신 것 같이 말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미리 다 알고 계셨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참다운 죽음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자기 죽음 후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체험에 죽음은 의심과 절망이 뒤섞인 심연으로 빠져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게쎄마니에서 “아빠 아버지, 당신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마르 14, 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 34)라고도 기도하셨습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과연 알고 계셨다면, 이 기도들은 죽음의 비극성을 과장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진실성도 결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자, 베드로가 나서서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스승을 말립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스승이 유대교 실세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는 비극은 겪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베드로의 충직함과 사랑에 감동하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면서, 당신에게 장애물이라고 꾸짖습니다.
복음서들은 초기 교회의 믿음을 수록한 문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 깨달음과 더불어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친 바를 배워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발족한 초기 신앙공동체들, 곧 교회입니다. 그들이 복음서를 집필할 때, 예수님에 대해 그들이 기억하던 바와 믿던 바를 함께 수록하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들의 삶은 이미 변하였고, 그들은 그들이 믿고 실천하던 바를 이야기로 만들어 복음서들 안에 담았습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다 알고 계셨던 것같이 말하는 것은 그분이 죽음을 피하다가 잡혀서 어찌할 수 없이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과가 죽음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이 도달한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고, 그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셨습니다. 이런 해석이 반영되어 각 복음서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리라고 세 번씩이나 예고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가 스승을 말리자, 예수님이 보이는 격한 반응도 사실 보도이기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스스로를 내어 주는 데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의 안전만 생각하고, 훌륭한 분이니까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겪은 죽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내어주어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고백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철이 들면,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합니다. 자기가 알아서 하는 일에는 자기의 미래를 위한 계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자격증도 받습니다. 수입이 있으면 저축도 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자기의 미래를 자기 스스로 보장하려는 노력이고, 그것은 인간으로 칭찬받을 일입니다. 이런 일에 익숙한 우리는 신앙도 우리의 미래를 위한 대책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거리 선교사들의 외침도 각자 죽음 후의 일을 위해 대책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는 미래를 보장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구원에 반대되는, 불행한 운명을 맞을 것이라는 뜻도 그 말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자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대책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삶의 운동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좁은 시야를 벗어나, 하느님이 중심인 넓은 시야 안에서 살겠다는 신앙인입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한 좁은 시야를 벗어나는 것은 때때로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을 오늘 복음은 ‘제 목숨을 잃는 일’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나 한 사람 배부르고, 나 한 사람 많이 갖고, 나 한 사람 편안하겠다는 우리의 좁은 시야입니다. 주변에 배고픈 사람과 고통에 우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넓은 시야에 사는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기 한 사람을 위한 호신술(護身術)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교섭하여 이 세상에서도, 또 죽어서도 잘 살겠다는 수작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비록 자기 자신을 소모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가 있어도, 하느님의 자비와 베푸심을 스스로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일률적으로 강요된 일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가 원하는 만큼, 또 각자 자기의 능력만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 10)라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신앙인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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