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편안하셨습니까?
비가 많이 와서 편안하지 않으시고 구질구질했지요?
또 뭐 이번 주에도 계속비가 많이 내린다고 합니다.
장마가 끝났어도 장마보다 더 긴 비가 오는데 이런 모든 것이 다 온난화, 우리 인간들이 잘못해서 자연을 다 망치고 스스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수도자가 꿈속에서 천국을 갔다가 옵니다.
거기에서 성인들이 생활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너무너무 실망을 했습니다.
천국은 이세상과는 뭔가 달라도 많이 다를 줄 알았는데
천국에 가서 성인들이 생활하는 것을 보니
성인들이 이 세상 살았을 때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더라~~
기도하고 노동하고 공부하고
또 기도하고 노동하고 공부하고
그래서 이 수도자는 꿈속에서도 불만이 가득차서
‘이게 무슨 천국이 이렇습니까?’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잘못생각하고 있다. 천국 안에 성인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안에 천국이 있는 것이다.
<천국 안에 성인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안에 천국이 있는 것이다.>
천국은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내적인 현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천국을 사는 이가 있고
똑같은 환경인데도 지옥을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이 지옥일수도 있고 천국일수도 있습니다.
부부끼리 그럴듯하게 살아도 둘 사이가 지옥일수도 있습니다.
본당 신부와 교우들이 그럴듯하게 살아도 지옥일수도 있고 천국일수가 있다.
교우들끼리도 천국일수도 있고 지옥일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마음이 괴로우면 지옥임을 우리들은 체험합니다. 맞지요?
<천국 안에 성인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안에 천국이 있는 것이다.>
천국은 바로 우리들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매일같이 천국을 체험하고 사십니까?
오늘 복음과 독서를 중심으로 하늘나라를 살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 번째, 하늘나라를 살기 위해서는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을 갈망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지난 주일에는 제가 이런 비유를 들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과나무 밑에 사과를 주워 먹는 돼지는 사과만 주워 먹을 뿐이지 절대로 사과나무를 쳐다보지 않는다.
게걸스럽게 사과만 주워 먹을 뿐이지 그 사과가 떨어진 곳을 쳐다보지 않는 것이 돼지라 그랬습니다.
은총을 그토록 받고 살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늘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고향을 갈망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천국 가는 첫 번째 지름길입니다.
이 세상이 더 좋아~~
이 세상이 더 좋아서 병 안 들고 오래 살려고 산삼을 캐먹고 오만 짓을 다해도 그 사람 얼마나 더 삽디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죽은 다음에 갈 저세상에 비하면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보다도 더 적은 세상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작은 것을 위해서 큰 거를 포기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에 대한 철저한 포기를 하며 삽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마음이 저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것조차 없다한다면 어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2독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일러주시니까 일러주시는 대로 갔다.
하느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위에 세워주실 천상도시를 바라보면서 살아라! 그 뜻입니다.
약속받은 것을 당장 얻지는 못했으나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면서 이 지상에서는 우리들이 타향사람들이요,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살라! 그 뜻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는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죽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들도 우리들의 마지막 고백은
“나는 믿음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하는 말이 죽기 전에 나와야 될 것이 아닌가?
나는 한평생 분노와 저주 속에 살다가 죽습니다.
나는 한평생 불신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어차피 삶은 고달픕니다.
여러분들이 사제를 볼 때 사제들은 편할 것 같지만 사제들의 삶도 고달픕니다.
또 신자들을 사제들이 쳐다볼 때 ‘야 신자들 행복하겠다.’
하지만 신자들도 얼마나 고달프게 사는지 모릅니다.
어떤 위치에 있던지 간에 우리는 다 고달픈데 중요한 것은 사제도 믿음으로 살다가 죽어야 되고 신자들도 믿음으로 살다가 죽어야 됩니다.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이 현실에 무관심 하라는 그 뜻은 결코 아닐 겁니다.
질서를....순서를 지켜라 그 뜻일 겁니다.
제발 하늘을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땅을 생각하라! 그 뜻일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되면 세상을 먼저 생각하고 나중에 시간이 남아돌아가면 그때 하늘을 생각하는 것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주님도 이 세상 무관심 하라는 말 안하셨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내가 거느려야 될 가족이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
땀 흘려서 일해야 됩니다.
그러나 순서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늘이 먼저고 그 다음이 세상입니다.
나그네 인생임을, 세상에 길손임을 제발 깨달아라! 하는 뜻일 겁니다.
세속에 빠져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삶을 바라보는 여유가 있어야 됩니다.
현재 내 삶이 하느님 쪽에 가까이 가는 삶인지~~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서 가는 삶인지~~
바라봐야 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뜻일 겁니다.
지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너무 악착스럽게 살지 말라! 그 뜻일 겁니다.
포기하라는 그 뜻일 겁니다.
어느 자매는 연도를 할 때마다 그 죽은 사람 이름대신에 자기 이름을 넣으니 모든 것이 포기가 되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관계가 이 세상살이가 어려울 때, 세상에 욕심이 생길 때 연도에다가 자기 이름을 집어넣고 ‘주여! 베드로를 위해 빌어주소서!’
그래서 연도는 죽은 자에게만 필요한 기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에게도 필요한 기도입니다.
두 번째로, 천국을 갈 수 있는 조건은
오늘 복음에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해 두고 살라.’ 하셨습니다.
하늘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하셨습니다.
우리의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 하셨습니다.
교우들을 보면 참 여러 종류입니다.
어떤 이는 보면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데도 늘 얼굴에는 불만투성이입니다.
또 어떤 이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도 늘 기쁘게 만족스럽게 유머스럽게 행복하게.... 감사할 조건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오염되지 않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숨어서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에게서 내적기쁨을 과연 누가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 영적재물은 뭡니까?
우리가 함께 봉헌하는 미사와 기도는 첫 번째 하늘에 쌓아두는 영적재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기도와 미사를 정성을 다해서 사제도 드리고 교우들도 참석했을 때 엄청난 재물이 이 미사 때 하늘로 올라갑니다.
또 살아가면서 작은 친절과 따뜻한 말 한마디/ 다정한 미소와/ 사심 없는 봉사/ 숨은 선행/ 이 모두가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는 일입니다.
셋째로 천국 문을 여는 조건은 오늘 주님께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준비하면서 살아라! 하십니다.
한마디로 사형수처럼 살라 그 뜻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형이 언제 집행될지를 모를 뿐이지 다 사형수들입니다.
이 복사아이들한테 죽음을 얘기하면 얘네 들은 절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적은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까웠던 가족이 떠나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형수들입니다.
이 자리에 오십 년 후에 남아있을 사람,
아마 복사 서는 아이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적어도 이 자리에 80%이상은 전부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뭐 그렇게 움켜쥐고 살아갑니까?
수의에 주머니가 없다는 사실은 왜 우리가 모르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 눈뜨면 ‘주님이외에 모든 것 포기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게 해 달라!’ 고 기도해야 됩니다.
이러한 종말신앙이 사라지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매일 매일을 마지막처럼 사는 삶!
여기서 삶의 활력이... 탄력이 솟아납니다.
진정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누구 땜에 괴로워하다가도 용서 못하다가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이 분노도 하찮은 것이고
이 미움도 얼마나 하찮은 것이고
내가 가져 보려고 하는 그 욕심도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깨닫게 되면서 포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드리는 이 미사가 내 생애 마지막 미사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손에 있는 이 묵주신공이 내가 마지막 묵주기도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레지오에 나가서 주회할 때 어쩌면 이것이 내 마지막 레지오 주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는 이 봉사가 어쩌면 생애 마지막 봉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찌 한눈을 팔고 딴청을 부리겠는가!
사제도 하루하루를 마지막으로 살 때 거룩하게 살 수가 있고
평신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생각지도 않는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됩니다.
주님대신에 그것을 죽음으로 바꿔놓고 생각해 봐야 됩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 세 가지, 첫 번째 뭐라 그랬습니까?
천국 문을 여는 첫 번째는 뭐라 그랬지요? 예?
신부님 강론은 참 들을 때는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데 십분만 지나면 기억이 안나요.
참 어디 쳐다보라 그랬어요?
하늘을 쳐다보면서 갈망하라고 그랬지요?
그런 욕심이 없으면 <절대 천국 가야 된다> 하는 그 욕심이 없으면 절대 천국 못 간다 이거예요.
두 번째는 뭐라 그랬어요?
재물을 어디다 쌓아 두라구요?
하늘에 쌓아두라.
세 번째는 뭐라고 그랬지요?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살아라.
언젠가 택시를 탔더니 택시 기사가 내가 사제인 것을 알고
자기 속에 있는 생각을 얘기합디다.
“신부님, 이 대한민국 이러다가 망할 겁니다. 반드시 망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다 썩었습니다. 실천하지 않고 말로만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다 말로만 떼우려고 합니다. 도덕과 윤리가 무너진 지는 오래 됐습니다. 어른 애 순서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돈으로 해결이 되는 세상이 됐습니다.”
그 기사님의 다소 과격적인 표현이지만 이 사회에 병폐를 지적한 말입니다.
어제도 뉴스를 보니까 아들놈이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부모를 죽였습니다.
그런 일이 뭐 어제 오늘 일이겠습니까?
이런 모든 것은 한마디로 하늘을 상실한 결과 자초한 일입니다.
세상에 빠져있기를 현세 지향적인 교회도 역시 썩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얼마나 물질이 들어와 있습니까?
성당도 크게 지어야 되고/ 신자도 많아야 되고/ 교회 안에도 악의 세력이 들어와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현세지향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하늘은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고향을 갈망하면서 우리재물을 쌓을 때 하늘을 기다리면서 깨어서 살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도래함을 믿습니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성녀 모니카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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