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성가신 물음들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일비재한 인권 탄압에 대해,
교회는 얼마나
억압당하는 자의 처지에서 항변하는가?
굶주리는 이들에게 그들이 혼자가 아니고
우리와 연계되어 있음을 알게 하는가?
이러한 연대감은 우리가 용감하게 나누는
데서만 드러나서는 안 된다.
스스로 심판대에 올려놓고,
가난한 이들을 더 비참하게 만드는
이기주의와 과소비 경향에 대해서까지
공동 책임을 지도록 촉구해야 한다.
진정 연대적이라면 정보도 나누게 될 것이고,
소비 위주의 생활습관도 바뀔 것이다.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나의 형제여,
그대가 감옥에 갇혀 고문 받는데
내 어찌 자유로울 것이며,
나의 자매여,
그대가 굶고 있는데
내 어찌 행복을 느낄 것인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라고 힐문하던 카인의 대답을 하느님은
묵과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가?
아래윗집 그리고 우리 가정 안에서는 어떻게 지내는가?
밝고 넉넉한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는가?
만일 이웃 누군가가
“내 아이는 자폐아랍니다.”
“딸이 마약중독자에요.”
또는 “남편이 중풍에 걸려 고생이 말이 아니에요.”
라고 말해올 때,
우리는 그 말 뒤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충분히 감지하는가?
학대당하는 이웃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와 남편의
구타에 시달리는 이웃 부인에게 관심을 갖는가?
먼저 고통에 민감하고 예민해져야
우리는 이웃에게 도움과 위로를 주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고통이라는 걸림돌”
오늘의 묵상 :
도움의 은총이라는 것은
결코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임하시어 이웃을 돕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들어 놓으신 피조물들을
경우에 따라서는 당신이 직접 도움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대부분이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피조물들을 이용하시어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1,17)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않게 하시어’(잠언3,27)
주님의 평화를 이웃과 나누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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