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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이웃을 위해 조금 더 힘들자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8-27 조회수563 추천수12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1년 가해 연중 22주일 - 이웃을 위해 조금 더 힘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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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탄’이라 꾸짖으십니다. 당신의 수난을 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대로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 자가 곧 사탄입니다. 예수님도 사실 인간적으로는 그 수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래서 만약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끝까지 그 잔을 거부하셨다면 예수님도 사탄이나 다를 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이나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처럼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보다 위에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이렇게 예수님은 사탄에서 벗어나는 길이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은 항상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아버지는 그래서 아드님께 당신 모든 것을 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사탄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 모두는 지옥에 갈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니 사탄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를 지옥으로 데리고 가서 한 어둡고 좁고 습한 공간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검은 연기가 나는 불속에 고통을 당하는 마귀들과 인간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이 끔찍한 광경을 보며 이 공간이 무엇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내가 너를 구원하지 않았으면 네가 왔어야 하는 곳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렇듯 아담과 하와의 자손인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지옥에 가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누가 아버지의 뜻을 어겨보지 않은 사람이 있고, 과연 어떤 누가 항상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뜻 위에 놓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인간은 원죄의 영향으로 기본적으로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우리보다 못한 사탄이 아니라 하느님 뜻보다는 자신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 모두의 모습의 반영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신 것은 그를 교회의 초석으로 세우시고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신 이후였습니다. 어쩌면 그가 모든 인간들의 약점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람이기에 교회의 첫 수장으로 세우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간다면 사탄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교황님이나 주교님이나 사제, 수녀님들 모두는 성인들이 아닙니다. 다만 사탄에서 성인으로 가는 중간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양인지 염소인지, 혹은 사람인지 사람의 흉내만 내는 원숭이인지는 마지막 날 결정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는 행위 하나 때문에 조금씩 내가 양이 되기도 하고 염소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주 잘 하고 있다고 해도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꾸준하지 않으면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부족한 것들은 연옥에서 다 채우게 될 것이고, 연옥에서 단련되었더라도 이 세상에서 노력한 것만큼 하늘에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알았던 한 친구는 남자였는데 많은 여자 형제 중에서 자라나다보니 여향성이 100%인 아이가 있었습니다. 몸만 남자지 말과 행동거지는 모두 여자보다 더 여성적이었습니다. 자신도 그것으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결혼한 모습을 다시 보았을 때는 어떤 남성보다 더 남성다운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목소리도 굵어지고 운동을 했는지 몸도 다른 남자들보다 건장했습니다.

그 사람이 한 순간에 그렇게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남자가 되기를 ‘원했고’ 꾸준히 노력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은 워낙 대단해서 원하고 노력하면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 자주 ‘내가 원한다’라고 하십니다. 진정으로 원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수장이었던 베드로도 수장이 되자마자 사탄이란 판결을 받았지만 꾸준히 노력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처럼 그 십자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수난을 반대하였던 것은 제자인 자신도 그런 수난을 당하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오늘의 꾸지람은 그에게 좋은 약이 된 것입니다. 또 그렇게 변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를 교회의 첫째로 뽑으신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죽음이 두려워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지만 그는 매일 닭이 울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 자신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탄이라 불렸던 그 사람은 이제 천상 예루살렘의 열두 초석 가운데 첫 째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옥에 갈 우리 운명을 바꿀 모든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죄를 지어도 그것을 다시 씻을 수 있도록 피를 흘리셨고 또 모범으로 무엇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알려주셨고 성령으로 우리의 노력에 힘을 더해주십니다. 그래서 이젠 우리에게 더 이상 사탄의 모습이 아니라 천사의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고 그래서 매일매일 노력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 것은 아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져야 할지는 잘 깨닫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유일한 계명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결국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영적으로 죽는 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자기 것을 챙기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잊고 상대를 위해 모든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죽으려고 하는 사람은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하느님이시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생명을 바치게 됩니다.

어쩌면 생명을 바치는 것 또한 너무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일매일 이것을 한 번 되뇌고 실천해보십시오.

“오늘도 이웃을 위해 조금 더 힘들자!”

십자가의 희생을 너무 대단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삶 속에서 크게 실천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작은 것부터 해야 합니다. 십자가가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고 선물하는 것이라면, 이웃을 위해 내가 조금 더 힘드는 것 또한 십자가의 희생이고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줄 알 때 결국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더 열심히 살아 성인처럼 되고 싶다면 이런 것을 실천해보십시오.

“오늘도 이웃을 위해 피가 마르게 살자!”

피가 마르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피는 생명이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매일 미사성제를 통해서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십니다. 내가 이웃을 위해 피가 마르면 이웃은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곧 순교이고 성인의 삶입니다. 어디 나가서 순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웃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내가 피가 마르게 노력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이 다시 이기적인 사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마귀도 내가 원해서 들어오고, 나도 내가 원해서 마귀처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인이 되고 하느님처럼 되는 것도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진정 그리스도의 모범대로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아무 것도 너를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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