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21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23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우리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 목숨을 잃어버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인생의 어느 시점에 가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떠올라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됩니다. 오늘 하느님 말씀 앞에 앉아 있는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오늘 복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알기는 알았지만 마음으로 깨닫지 못한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한 것처럼,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라는 물음을 자신에게 해보는 것이지요.(예레 20,79 참조) 제 시선을 떼어놓지 못하게 하는 말씀은 무엇보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구절입니다.(25절)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본문에서 ‘자기 목숨’이란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하십니다.(2526절) 결국 한 사람이 예수님을 정말 따를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은 그가 ‘자기 목숨’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으로 저 자신을 돌아보도록 초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목숨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은 자기 목숨의 주인이 아닙니다. 목숨은 하느님이 주신 거라고 성경은 누누이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코에 생명을 불어넣으시어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창세 2,7) 하느님은 모태에서 우리를 빚기 전에 우리를 아시는 분입니다.(예레 1,5) 하느님은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반석이십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뻔한 사건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인생을 바꾸게 한 선택들이 있었는데, 돌아보니 모두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뒤를 따르려면 먼저 ‘자기 목숨’을 잃어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은 제게 이런 물음을 던집니다.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내 몸이, 내 영혼이, 내 마음이, 내 인격이 정말 감히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목숨이 ‘내 목숨’이라고 손안에 꼭 움켜쥐고 있을 자격이 나에게 있는가?
이렇게 ‘자기 목숨’을 이해하면, ‘당신 이름’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라는 말이 더 쉽게 이해됩니다. 사람이나 물건, 아무리 값진 보석과 호화스런 집이 눈앞에 있다 해도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사람은 그것을 갖기 위해 한 발자국도 떼지 않습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발이 갑니다. 내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 이름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도 한결 쉬워질 것 같습니다. 제 목숨의 주인은 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 하느님이 알아서 모든 것을 하시고, 원하실 때에 거두어 가시고, 하느님의 영이 이끄시는 대로 가겠다고, 주시는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는 자세가 제게는 지금 이 상황에서 ‘자기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고 복음적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한다고 발버둥치는 통에 볼품없이 초라해진 우리 인생과는 대조되는 삶, 자유로운 삶입니다. 이렇게 자기 목숨을 하느님 손안에 놓아버릴 때, 인생을 뒤덮는 온갖 두려움과 이기심·탐욕·아집·질투·죽음에 대한 공포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적은 수의 사람만 들어간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도 선택할 용기가 생깁니다. 일상은 내 인생 계획에 따라 철저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바치는 시간’(제2독서: 로마 12,12)이 됩니다.
인생의 어느 시점이든지, 이 세속화된 세상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여 이렇게 자기 목숨을 잃는 삶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을 마음 안에 담고, 끊임없이 기억하고, 그 이름으로 숨 쉬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현재 어떤 형태로든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 오직 아버지에게 속한 영광에 싸여 다시 오실 때 자기가 한 행실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마태 16,27) 그 대가는 그분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묵상(Meditatio)
우리 생애 마지막 순간에 부르고 싶고, 부를 힘마저 없다면 마음속에 담아가고 싶은 이름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분 때문에 “저희는 온종일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로마 8,36; 시편 44,23 참조). 인간은 빈 말을 하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말씀만을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 현존 안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분에게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됩니다.
기도(Oratio)
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시편 63,2)
임숙희(가톨릭대학교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