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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1-08-28 조회수818 추천수19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1년 8월 28일 연중 제22주일
 
 
 
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Mt.16,24)
 
 
제1독서 예레 20,7-9
제2독서 로마 12,1-2
복음 마태오 16,21-27
 
인터넷에서 꼬마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된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글은 참 간단합니다. 그러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더군요. 그 글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엄마는 나를 예뻐해 줘서 고맙다. 냉장고는 먹을 것을 줘서 고맙다. 강아지는 놀아줘서 고맙다. 그런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 꼬마의 말이 맞는 것일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아빠 없이는 이 꼬마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빠의 존재는 중요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그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단순히 아빠와 만나기 힘들다는 이유로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문득 주님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참 힘들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주님의 말씀도 듣지 못한다고 우리는 주님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과연 우리가 주님 없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요?

구름에 태양이 가려져 세상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렇다면 태양이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구름 뒤에 분명히 태양이 있으며, 언젠가는 구름이 걷혀서 태양이 다시 나올 것이라는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통과 시련으로 인해 주님이 가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기 보다는 끝까지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우리들은 주님으로부터 커다란 은총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고통과 시련을 부정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는 꾸중을 듣게 되지요.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사람의 일로서 고통과 시련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로서 고통과 시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책에서 본 글 하나가 생각납니다.

“얼마 전에 동네 약수터에 온 할머니에게 100세가 넘도록 장수하시라고 했더니 정색을 하며 화를 낸다. 팔순 나이에 온 몸이 아프고 힘들어 죽겠는데 앞으로 20년을 더 고생하란 말이냐고 따진다. 그때 깨달음이 왔다. ‘죽음도 축복이라는 것을’”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을 하느님의 생각을 바꾸어 나갈 때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보다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들, 고통과 시련을 피하기보다는 그 안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긍정적인 자세들이 바로 하느님의 생각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요?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불행이나 고충을 털어 놓는다든지 동정을 구걸하지 않는다. 남몰래 참아내면 언젠가 고통도 사라지고 도움의 손길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발타자르 그라시안)



 

웃음


수족관에 갇혀서인지 우울해 보입니다.

미 개척시대에 한 영국 선교사가 미국에 도착했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신대륙에서 온 몸에 털이 난 동물(?)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보면 원숭이 같고 또 저렇게 보면 사람 같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국에 전보를 보냈지요.

“사람과 원숭이를 구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전보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웃는 놈은 사람이고, 웃지 않는 놈은 원숭이이다.”

사람이기를 피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웃기보다는 화를 내는데 먼저인 분들이지요. 사실 웃는 얼굴과 화를 내는 얼굴, 어떤 얼굴이 보기 좋습니까? 스스로 보고 싶은 얼굴은 웃는 얼굴이면서도 왜 남에게는 화낸 얼굴을 더 많이 보여주는지요?

예수님께서도 ‘남이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씀하셨지요. 남이 원하는 웃는 얼굴, 이 얼굴을 할 때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야말로 웃음이 그치지 않는 세상, 아마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Somewhere In My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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