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아름다운 성지를 만들기 위해서 아직도 성당밖에 공사가 한참 진행 중에 있습니다.
신자들이 많이 방문하기 전에 공사를 마치려고 하지만 일이 쉽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미사오신 교우 분들, 불편하시더라도 안전사고 유의하시면서 둘러보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을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원칙은 인간이 하느님을 선택한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선택한 교회입니다.
그 인간을 선택하여 부르실 때, 어떤 말로 내 제자가 되라고 하셨을까요?
성서를 아무리 살펴봐도...우리들이 세례 받을 때, 아니면 예비자 교리 받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감언이설로, 아주 달콤한 말로 꼬드기거나 유혹한 적은 없으십니다.
세례 받으면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을 것이다.
나만 따라다니면 이 세상 걱정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나만 따라다니면 한 달에 한 번씩 돈벼락을 맞게 해주마!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그런 말로 유혹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셨을 때
첫 번째, 니 십자가 니가 지고 나를 따라라
두 번째, 내 왕국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계명 속에서 살려고 할 때는 이 세상의 것....분명히 힘들겠지만
그러나 참고 견디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주님께 속았구나... 세례만 받으면 모든 게 다 착착 해결되고 아프지도 않고
물질적인 고통도 없어지는 줄 알았더니 어떻게 더 힘들까!’
주님께서는 물론 물질의 축복도 주시고, 이 세상의 복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병 낫게 해주지요?
마귀 들린 사람 쫓아내 주셨고...열심히 기도하면 물질의 축복도 분명히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치유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의 축복도 영원한 축복은 아닙니다.
병이 나았다 해서 그 병의 치유를 받은 수혜자들이 영원히 살 수 있느냐!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선택된 자의 첫 번째는 십자가 지고 예수님 따르는 겁니다.
세례 받고 신앙생활하시다보면 세례받기 전보다 더 불편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전 같으면 아무 거리낌 없이 했던 것들이 이제는 양심의 소리 때문에, 옳게 살지 못하면
분명히 양심에 빨간 등이 켜집니다.
세례 받고 나서 그 힘든 고비를 못 넘기는 사람은 냉담에 빠집니다.
세례 받고 자기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으면 분명히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사제 생활도 적당히 하면 쉽겠지만 올바르게 사제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힘이 듭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그 길이 고생스럽다는 것,
그거 각오하라는 겁니다.
모순되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입니다.
그 길이 험하고 문이 좁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 고생 지지리 했던 예언자입니다.
박해도 수없이 받았으나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인생이 너무너무 괴로워서 뭐라 그랬습니까?
‘하느님 때문에 신세 망쳤다.’
예레미야는 인간적으로 볼 때 박복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인들의 삶은 신앙인 눈으로 볼 때는 위대한 인생이었지만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고달픈 인생이었습니다.
어느 성인, 어느 예언자치고 편안하게 살다 가신 분들이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많은 눈물을 흘려야 되지만....
결코 필요 없고 의미 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믿어야 됩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왜 이 고생고생을 하면서 피눈물을 흘려야하는지 깨닫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으로 다시 되돌아오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박해받고
죽을 거라고 당신 입으로 제자들에게 얘기합니다.
그 말을 들었던 제자 중에 하나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렇게 돌아가실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강하게 항의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이 뭐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느냐?’
베드로의 단순하고 우직한 마음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하는 욕 중에서 마귀라고 하는 욕보다 더 큰 욕이 어디 있습니까?
아마 예수님은 으뜸 제자였던 베드로사도의 입에서 당신의 가는 길을 말리는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이 왜 이토록 예민한 반응을 보이셨을까?
아마 그것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 당하셨던 기억이 떠올랐을 겁니다.
여러분들 기억나시죠?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사탄은 세 가지의 유혹을 했습니다.
배고픈 예수님에게 뭐라 그랬습니까?
돌멩이를 들어 보이면서 ‘이 돌더러 빵이 되게 하라.’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것 줘라. 그러면 너 따를 것이다....너는 얼마든지 돌멩이를 빵이
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 유혹이 어려웠던 것은 뭐겠습니까?
우리는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맘만 먹으면 돌이 아니라 바위보고 고기가 되라.... 해도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셨지요.
할 수 있는 그걸 못하는 것, 그것이 유혹입니다.
내가 눈 한번만 찔끈 감으면 부정을 할 수 있고 눈 한번만 찔끈 감으면 얼마든지 내가 편안하게...
잘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받습니다.
‘돌더러 빵이 되게 하라..사람들에게 물질적인 것 줘라.. 너 따라다닐 것이다.’
두 번째 유혹은 높은데서 뛰어내려라.
이 말뜻은 ‘사람들에게 감동적이고 신기한 것을 보여주면 너를 따를 것이다.’
세 번째로는 나에게 절하라!.
그 얘기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 많은 사람들이 너를 따라 다닐 것이다.’
이런 세 가지의 유혹을 물리치는 게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강한 말씀에 물러가면서도 루가 복음 4장 13절에 나오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떠나갔는데, 그 기회가 바로 언제였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들은 사탄이 베드로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예수님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수제자의 입을 통해서 사탄이 주님이 가시는 그 길을 막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빛을 지니고 있는 자’라고 하는 천사장 루치펠이 타락을 해서 천국에서 쫓겨나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탄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악마’ ‘하느님과 등을 돌리고 있는 자’ 또 다른 말로 ‘반대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세력이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하느님의 명령을 인간의 욕망으로 바꾸게 하는 압력이며 실존입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의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도 사실 두렵고 불안한 마음인데 베드로가 주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니
그는 분명히 장애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으로 그렇지 않아도 두렵고 힘든 판인데
‘주님 안 됩니다. 우리 도망갑시다. 그렇게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우리들도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생각대로 살 때....
기도하면서 분별력을 청하기보다는 매사에 감정적으로 처리하려고 할 때,
분노하면서 내 멋대로 일을 처리한다면 분명히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장애물입니다.
베드로에게 일침을 놓으시고 마음을 가라앉히신 다음 차분하게 제자들에게 훈계를 하십니다.
신앙인들의 기본수칙, 나를 따르려고 하는 자들의 기본 수칙을 얘기하십니다.
첫 번째가 자기를 버려라.
자기를 버리는 것이,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압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대로 나는 갈수록 작아지고 그분은 갈수록 커지셔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반대입니다.
자기를 채우려고 하는 이러한 유혹은 사제든 수도자든 평신도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집요하게 찾아오는 유혹입니다.
삶의 순간순간을 예수님 중심이기보다는 내 중심으로 살 때가 많습니다.
王자리에 항상 자기 자신을 앉혀놓습니다.
여러분들, 주님이 첫째 자리에 계십니까?
많은 경우에 양심적으로 스스로 고백할 때 주님이 첫째 자리에 없습니다.
첫째 자리에 돈이 올라가 있을 수도 있고/ 자식이 올라가 있을 수도 있고
지 아픈 몸뚱아리가 첫째 자리에 올라가 있을 수도 있고....
하느님 나라를 찾으면 그 나머지 것은 다 주신다고 했거늘....
우리 약한 인간들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두기 보다는
우선 자기에게 필요한 세속적인 것을 첫째 자리에 두고 있습니다.
현재 여러분의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하는 것은
십중팔구 그것은 아직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포기한 만큼 옵니다.
영적 행복은 내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만큼 옵니다.
두 번째는 매일같이 자기 십자가를 져라!
마태복음에는 ‘매일’ 이라고 하는 말이 안 나오지만
루가 복음에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라!’ 는 표현이 나옵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뜻합니다.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은 고통만큼은 평등하게 주십니다.
고통은 억지로 받아들이기는 해도... 사실 사랑하기까지는 어렵습니다.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몸이 너무 아파서 건강이 주는 십자가가 있고/ 물질 때문에 찌들어 살아야 하고 괴로워해야 하는..
물질이 주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십자가를 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지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는 것임을 알아야 될 겁니다.
물질에 따라서 지게로 져야 편한 것이 있고
아니면 가슴으로 끌어안아야 훨씬 편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면 뒤로 자빠집니다...십자가는 끌어안아야 됩니다.
우리 등위에 올라가셔야 할 분은 예수님이요.... 십자가는 끌어안고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지고 있는 십자가가 남편일수도 있고 / 속 썩히는 자식일수도 있고
아픈 몸뚱아리일 수 있고 / 돈 떼먹고 간 대녀일수도 있고
속 썩히고 마음 아프게 하는 시누이일수도/ 남편일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지려고 하시면 절대 못 일어납니다.
여러분 삶의 일부로 끌어안으십시오.
암에 걸리신 분은 암을 여러분의 몸뚱아리로 인정하십시오.
암 가진 채로 전이 안 되고 남들이 사는 만큼 살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십자가의 삶은 쉽지 않지만 실망하거나 절대 주눅 들지 맙시다.
때로는 억지로 지고 가는 십자가도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기특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십자가의 길 14처를 하다보면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 지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가 기쁜 마음으로 졌겠습니까?
아닙니다.
일 끝나고 돌아오다가 길거리에서 사형수가 십자가 지고 간다고 하니까
구경하다가 키가 크다 보니까 로마군인들에게 잡혀서
“너 이리 나와 봐라..이 예수꺼 잠깐 지고 가라!”
그 당시 십자가는 사람의 피를 말려 죽이는 사형틀입니다.
그 십자가에 손만 대어도 3대째 재수가 없는 겁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 지고 가는 그 사이에 예수님은 기력을 회복해서
다시 그 십자가를 받아서 골고타까지 올라가실 수 있었던 겁니다.
솔직히 여러분들 ,십자가 기쁘게 지고 가는 사람 여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십자가 자체가 기쁨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는 것, 힘이 듭니다.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 6년째 모시고 있는 그 며느리가 기쁘게 똥오줌 치겠습니까?
억지로 치는 겁니다.
그러나 억지로 지는 십자가라고 해도 주님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양심의 가책 받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자매님, 어떻게 그 똥오줌 싸는 시어머니 6년이나 치고...”
효부상 받고 많은 사람이 칭찬하지만 솔직히 늘 양심에 가책이 된대요.
'저 늙은이 하루에 열두 번씩 죽기를 바라면서 똥오줌 치는데 ....나 기뻐서 하는 게 아닌데....마지못해
하는 건데... '
기쁨 없이 지는 십자가도 많습니다,
그러나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주님 보시기에 ‘니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다 아십니다.
그리고 기특해 하십니다.
특별히 고통이 올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질 때마다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모님은 우리의 기도를 전해주시는 전구자이십니다.
성모님은 은총의 전달자이십니다.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는 주님께 가까이 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십자가가 아무리 무거워도 우리의 전구자이시며 은총의 중재자이신
성모 어머니가 계시다고 하는 것, 우리 천주교신자들에게 얼마나 큰 힘입니까?
세 번째로 예수님은 ‘따라야 한다.’
따른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절대적인 순명하라! 그 뜻입니다.
순명하지 않으면 절대 따르지 못합니다.
얼핏 보기에 구덩이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아도 예수님의 말이기 때문에 구덩이로 기어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나 사실 구덩이가 아닙니다.
때로는 나를 시험해 보시는 그런 채찍일수도 있습니다.
순명하지 않으면 절대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사제들도 장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에 따라야 합니다.
주교님이 나에게 하는 말이 이해가 안 가지만 일단 ‘네!’ 해야 됩니다.
‘네!’ 하다 보면 로마서 8장 28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고 나쁜 일이 상호작용하여 선한 결과를 맺게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 구세주시요, 인생항로의 나침반임을 믿어야 합니다.
캄캄한 밤에 넓은 바다 한복판에서 어부들은 별을 보고 목적지를 찾아가고
손바닥에 놓인 작은 나침반 하나를 보고 가족이 있는 곳으로 기를 쓰고 찾아갑니다.
이 험한 인생살이에서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싸움에서 얼마나 길을 잃고 헤맬 때가 많습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천국을 제시해주시는 예수그리스도가 나침반이십니다.
그 분이 제시해 주시는 대로 우직하게 따라가 보십시오.
신앙생활은 머리 굴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질러가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그저 무식하리만큼 우직하게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손해 볼 것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앙인의 기본수칙으로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 째, 자기를 버려라.
버린 것만큼 영적 행복이 올 것입니다.
두 번째, 매일 자기 십자가 져라!
남편에게 넘기려고 하지 말고, 이웃에게 넘기지 말고 ....
사제도 사제만이 질 수 있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교우들이 아무리 “우리 신부님, 십자가 너무 큰데 제가 대신 져 드리겠습니다.”
하더래도 대신 질 수가 없습니다.
사제만이 질 수 있는 십자가가 있고/ 집안에서는 가장으로서 남편만이 질 수 있는 십자가가 있고
아내로서 아내만이 질 수 있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지 십자가는 크기가 다르고 무게가 다르겠지만
주님께서 대패로 잘 깎고 다듬어서 우리가 그 가시에 찔리지 않게끔
그 무게에 눌려서 못 일어나지 않게끔.... 무거운 십자가는 절대 주시지 않는다는 것, 믿어야 됩니다.
십자가는 끌어안을 때 훨씬 가볍다는 것 우리들은 묵상해야 됩니다.
세 번째로, 따르라!
따르는 것은 순명을 의미합니다.
순명하지 않는 자는 지 멋대로 편한 길을 찾아갑니다.
주님께서 가시밭길을 가시면 따라가야 합니다.
순명은 기적을 낳습니다.
순명은 기쁨을 가져오고 순명하는 자는 행복합니다.
순명은 우리들에게 명예를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순명할 때는 우리들을 들어 올려 주십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께서 그런 순명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성모님께 ‘천주의 모친’
이외에 수많은 칭호를 붙여드립니다.
순명하는 자는 하느님이 들어 올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면 고통이 없고/ 부자 될 거고/ 모든 것이 척척 해결 될거라고....
말씀하신 적 없습니다.
이 세상보다는 영원한 세상을 약속하셨다는 것 믿고서
내 십자가 남에게 떠넘기지 말고 기도의 힘으로/ 성사의 힘으로/ 성모님의 전구의 도움으로
주님께 은총 받아 기쁘게 지고 나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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