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 유럽에서는 음력을 전혀 사용할 일이 없는데다가 올 해는 윤달까지 껴서 예년보다 한 달 가까이 늦은 아버지의 기일을 잊고 있었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서야 뒤늦게 알았지만 너무 죄송한 마음에 '그럼요, 알고 있지요'라고 거짓으로 말씀드렸다.
세월이 흐르면 많은 것이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9년 만에 아버지의 기일까지 잊고 살 정도로 내 삶에 열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세월 탓으로 돌릴 일만도 아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바로 한국외방선교회에 입회했기 때문에 나는 그 동안 단 한번도 아버지의 기일을 이 생에 남겨진 당신의 가족들과 보내본 적이 없다.
혼자 계시는 어머니께서 준비하시는 사별한 남편의 기일이 어떤 풍경일지 궁금할 때도 있다.
얼마 안 있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머나먼 여행을 떠나야 하는 분이셨지만 내 아버지는 최후의 날들을 마치 옆 산에 소풍을 가시는 듯 평소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이 보내셨다.
3개월이 채 못되는짧은 투병 기간 동안 밤 잠을 못주무시고 깨어계실때 마다 나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부터 그 최후의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생애를 들을 수 있었다.
한 인간이 최후를 바로 코 앞에 두고 들려주는 자신의 '라이프 스토리'는 그 자체로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여행을 떠나시기 보름쯤 전인가보다.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온 내 친구들과 악수를 한번씩 다 하신 아버지는 내게 '오늘은 친구들과 함께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들어오지 그래?'하시며 친구들과 함께 할 식사비를 챙겨주셨다.
오랫만에 늦은 시간에 친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그때까지도 잘 받아들여 지지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 슬프게만 느껴져서 그 동안 아버지 앞에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고 그리고는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그 다음날 나는 아버지로부터 오랫동안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그게 아닌데...... 너무 멀었어. 아직도 삶의 기준이 잘 잡힌 잔잔한 맛이 없고 너무 출렁거려 걱정이다."
나는 그 때 '죄송하다'는 말 대신에 내 맘도 잘 모르시고 이렇게 크게 화를 내시니 '서운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오랜 이별을 해야 할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얼마나 '서운'한 것이었던지......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던 날 겨우 남은 기력으로 나를 향해 당신의 엄지 손가락을 세우시며 '내 아들로서 넌 훌륭했어'라고 하셨다.
세월이 흘러 십년 쯤 지나고 보니 출렁이지 않고 잔잔한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대하며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신이 허락하신 친구들과의 저녁 시간을 단지 두렵고 슬프다는 마음을 탓하며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오는 못난 아들을 남겨 놓고 떠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사는 건 그렇게 표면의 감정에 맡기며 살아가는 '그게 아닌데... 아직 멀었다'라는 그 답답함을 이제는 조금 알것 같다. 그러면서 한 인간으로는 많이 부족하지만 '당신의 아들로서는' 썩 훌륭했다는 당신의 마지막 말씀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고......
난 끝내 아버지께 '죄송하다'는 말씀 한 마디를 빠뜨리고 먼 이별을 했다. 아니 그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내 가까운 이웃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를 계속 미루고 시간을 흘러보내고 있다.
그때 하지 않으면 영원히 하지 못할 말, '미한하다'는 말을......
내 입장에서만 바라보기를 고집한다면 영원히 하지 못할 말, '미안하다'는 말을......
우리가 천상이라 부르는 영원과 절대의 하느님 나라에서 느릿한 걸음으로 산책을 즐기고 계실 것만 같은 아버지께 한 말씀 드리고 싶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지금도 많이 출렁이는 맘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당신이 제게 하셨듯이 당신이 떠나가신 뒤 제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도 '썩 괜찮은 자녀'가 되기 위해 정진하겠습니다.
아버지, 참 죄송합니다......"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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