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속 성경 한 말씀] ‘빵 나눔’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파하는 씨앗 세상에서 능력 없는 사람, 병든 사람, 나이 든 사람, 힘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소외시키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교회는 이런 세상과 달리 그들을 따스하게 받아 주고 보듬으며 치유하는 가족 같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곧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지난해 9월 22일, 한 장의 사진이 많은 이를 감동케 했다. 용인시 제일초등학교에서 열린 가을운동회에서 다섯 명의 6학년 아이들이 함께 손을 잡고 달리는 장면이 카메라에 찍혔다. 사연은 이렇다. 달리기 때마다 늘 꼴찌를 하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연골무형성증을 앓고 있어 또래보다 키가 작고 뚱뚱했다. 아이는 이번 달리기에서도 꼴찌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 넷이 달리기를 하다 멈춰 서서 꼴찌로 달리던 친구의 손을 잡고 함께 결승선을 향했다. 일등만 살아남는다는 통념을 깬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사건이었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참 좋아하셨을 것이다. 이렇듯 경쟁하지 않고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 보자는, 인간 본성에 기반한 연대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미사에서 행하는 ‘빵 나눔’은 나눔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치의 연대성을 깨닫게 한다. 바오로 사도는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과 형제자매와 친교하는 것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코린토 공동체에 강조한다.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6-17). 성체가 그리스도와의 일치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사이의 일치를 나타내고 강화시켜 준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부 아우구스티노는 성체성사를 ‘일치의 표지와 사랑의 끈’이라고 불렀다. 자기 것을 나누고 이웃과 친교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부유해서도 이웃이 사랑스러워서도 아니다.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나누어 먹고 그분과 일치하였기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을 내주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자신을 내주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형제자매로서 형제애를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미사 경본 총지침>은 이렇게 밝힌다. “빵을 나누는 동작(Fractio panis)은 사도 시대에는 단순하게 성찬례를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이 동작은 일치와 사랑의 표지로서 성찬례의 힘과 중요성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 준다. 곧 하나의 빵 안에서 모두 하나가 되는 일치를 드러내고,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는 형제들의 사랑을 나타낸다”(321항). 빵 나눔이 성찬례의 정신인 나눔과 일치와 사랑의 주제를 잘 드러내는 동작임을 가장 오래된 교회 전승이 확인해 준다. 유다인은 축제 회식뿐 아니라 일반 식사 때, 가장이 먼저 한 덩어리로 된 둥글고 큰 빵을 들고 찬양 기도를 바친 다음 식탁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빵 나눔을 통하여 사랑과 일치를 다진 것이다. 그 배경에 따라 사도 교회는 빵 나눔에 상당히 큰 비중을 두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동작이 어린양이며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기 위한 준비 행위임을 알았다(1코린 5,7; 10,16-17 참조). 그래서 빵 나눔은 사도 시대에 성찬례의 대표적 명칭이 되었다(사도 2,42; 20,7.11 참조). 사도 시대 이후 이 예식에 상징적 의미가 추가되면서 비중이 커졌다. 특히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사제단이 주교를 중심으로 나누는 빵이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치하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행위라고 설명하여 그 의미를 한층 높였다. 그러나 8-9세기경부터 대부분의 지역에서 성찬례에 가정용 빵을 사용하지 않기 시작했다. 대신에 동전 크기의 작은 빵이 성찬용 빵으로 등장했고, 12세기에 와서는 작은 빵, 곧 제병이 일반화하면서 빵 나눔은 폐지되었다. 오직 사제가 전례용 대제병을 세 조각으로 나누되, 상징적 의미를 위해 한 조각은 아주 작게 잘라 성작에 넣었다. 이를 ‘섞음 예식’이라 하는데, 다른 두 조각을 영성체 때 사제가 모두 영하면서 빵 나눔의 깊은 상징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바오로 6세 교황은 미사 개혁을 통해 사제가 하나 또는 여러 개의 큰 제병을 작은 조각으로 나누고 적어도 그 조각들을 신자들에게 건네줌으로써(<미사 경본 총지침> 321항 참조) 빵 나눔의 의미를 복구하려고 노력했다. 나눔과 일치라는 사랑의 행위인 빵 나눔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혼인성사나 소규모 인원이 드리는 미사 때 사제용 대제병을 사용하여 그것을 축성하고, 나눈 조각을 신랑과 신부, 참석한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함께 영하는 것이 좋다. 빵 나눔은 또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일화를 상기시켜 준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0-31).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두 제자가 그분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시고 그 나눔의 희생을 통해 주님으로 드러나셨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자기중심적이며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이 세상은 전쟁터와 같다. 이러한 곳에 사랑의 향기를 전하는 꽃이 되라고 이끄는 것이 바로 빵 나눔 예식이다. 빵 나눔과 영성체는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널리 전파하는 씨앗이다. * 윤종식 신부는 의정부교구 소속으로 1995년 사제품을 받았다.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고, 현재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전례학을 가르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5년 4월호(통권 469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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