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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23주일, 2011년 9월 4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02 조회수399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23주일, 2011년 9월 4일.

 

마태 18, 15-20.

 

오늘 복음은 신앙인이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말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일러보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구약성서 레위서에 있는 말을 마태오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가 옮겨와 해석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레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말라.”(19, 17-18).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미워하거나 보복하지 말고, 타이르라는 말입니다.

 

마태오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율법서의 표현을 빌려, 예수님이 가르친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며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런 노력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들의 공동체 안에 살아있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 시대에 그들이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실천하던 바를 요약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자구(字句) 그대로 오늘 우리를 위한 실천 지침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2000년 전의 행동지침이 오늘도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시대가 다르면, 사람들의 행동 방식도 다릅니다.

 

옛날 사람들은 타일러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미덕(美德)이고 사랑이었습니다. ‘좋은 약이 입에 쓰고, 좋은 말이 귀에 거슬린다.’는 격언이 통용되던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앉아 잘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현상이 사라졌습니다. 현대인은 타이르는 행위를 불필요한 간섭으로 여기고, 충고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각별히 서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충고는 상대방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주제넘은 일로 이해됩니다. 오늘은 각자가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정보를 얻고, 각자가 취사선택하여 자율적으로 결정하며 삽니다. 따라서 오늘 충고는 이웃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비록 과거에 자기에게 피해를 준 이웃일지라도, 외면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형제자매로 대하는 노력을 하라고 말합니다. 이웃이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먼저 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그것으로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이르고, 그래도 되지 않으면 교회공동체에 알리면서까지 최선을 다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모두 실패하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생각하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되, 그것이 실패할 경우에는 이교도나 세리에게 하듯이, 그를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두라는 말입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이교도나 세리는 미워하고 말살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려 해도, 그 마음이 이웃에게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지만, 이웃은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그것이 이웃에게 반드시 전달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나는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어도, 상대방은 받은 상처 때문에 많이 아파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상처가 치유되도록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먼저 이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는 말씀도 오늘 복음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합니다. 예수님의 실천이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오.”(15, 17).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 세리와 죄인들과도 어울렸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마태 11, 19)라는 인신공격성 혹평을 들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은 그 시대 유대교의 해석에 따르면, 하느님이 버린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도 버려야 하는 대상입니다. 병은 죄 때문에 하느님이 주신 벌입니다. 그런 유대교 사회 안에서 예수님이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일은 하느님을 거슬려 죄를 짓는 행위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이 죄인이라 외면하던 사람들과도 어울리면서 하느님은 사람을 버리지도, 벌주지도 않으신다는 사실을 인식시키려 하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들이 모인 것은 재물이나 명예를 얻거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합니다. 교회는 먼저 섬기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 45)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도 당신과 같이 섬기면서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0, 43)는 말씀입니다. 교회에는 자발적 섬김이 돋보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 병든 이, 버려진 이들을 위해 섬김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실천하는 공동체라야 합니다.

 

교회는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섬기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신앙인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이웃 앞에 우월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신앙을 동기로 모였다고 하면서, 모여서 기도한다고 하면서, 남을 비방하고 성토하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배 아픈 사람의 모습입니다. 신앙공동체에는 섬김이 돋보여야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다.”(1요한 4, 7)고 요한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군림하지 않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면서 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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