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추석이 가까워 오니까 금초들을 많이 가신 것 같습니다.
제대위에서 딱 헤아려보니까 우리 본당 신자들 교중미사, 평소에 참석하시던 분들 가운데서 일흔여섯 명이 안보입니다.^^
여러분은 몰라도 저는 정확히 압니다.
뭐 새벽미사 하셨던지, 저녁미사에 나오시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1독서 지혜서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오지요?
썩어 없어질 육체가 영혼을 내리누른다.
다시 말하면 썩어 없어질 육체가 그 영혼을 찍어 내리누른다.
이 이야기는 실화인데 오래전에 군 형무소에 사형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군인하나는 휴가 때 나와서 민간인을 총으로 쏴 죽였고,
또 다른 군인하나는 자기 동료를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그래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형수의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사형수는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도 식욕만큼은 대단했습니다.
주는 대로 척척 받아먹었지요.
그는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동안에 고기를 실컷 먹고 죽을 수 있을까!
오로지 그 생각만 하다가 ‘죽기 전에 내 몸을 팔겠다.’
이래서 그 당시에 돈 10만원을 받고 죽고 난 다음에 어느 대학에 자기 몸뚱아리를 해부하도록 미리 팔아넘겼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기의 소원대로 고기를 실컷 먹었습니다.
같은 감방에 있던 다른 친구가 그 모습을 보면서
“그 닭고기 혼자 먹으니 배부른가?” 하고 물으니
“배야 부르지.....”
“그럼 그렇게 먹는 그 고기가 맛은 있소?” 하니깐
“이눔아! 내 시체를 내가 뜯어먹는데 무슨 맛이 있겠냐?”
그는 자기 시체를 판 돈 가운데에서 약 삼만 원 정도, 고기를 사먹다가 사형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육체가 영혼을 짓누른 하나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는 사람들이 면회 왔다가 영치금으로 천원, 이천 원.... 넣어 준 것을 한 푼도 안 쓰고 만 오천 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돈을 가지고 무엇인가 좋은 것을 할 수 없을까?’ 늘 그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천주교 신자가 찾아와서 얘기하기를
우리본당에 지금 성당을 짓고 있는데 성당이 가난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의자 하나씩 봉헌하고 독서대 봉헌하고.... 이렇게 봉헌을 하고 있다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습니다.
즉시 그 사람은 그 성당 짓는 곳에 강론대를 사는데 이 만오천원을 보태달라고 했습니다.
“강론대가 얼마나 가는지 모르지만, 내가 비록 이렇게 못된 짓을 하고 죽지만..... 그 강론대 위에서 좋은 말씀이 퍼져나가서 나처럼 죄짓고 사는 사람을 회개시켜주기를 바랍니다.”
신부님은 성당을 축성하는 날, 그 사형수가 봉헌했던 돈으로 산 그 강론대위에 서서
“여러분, 이 강론대가 이러이러한 사연으로 지금 이 자리에 서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는 신문기자들 몇이 와있었는데 그 기사를 적어서 신문에 냈고, 그 신문을 대통령이 읽었고 대통령은 즉시
“그 사람 사형 중지시켜라.”
해가지고 즉시 사형이 중지 됐고..그 사형수는 칠년 정도를 더 살다가 풀려났죠.
그 사람은 지금 현재 수도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성당이 바로 내가 처음 지었던 군인성당이었고, 그 강론대는 지금도 그 군인성당에 존재합니다.
이 소설 같은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한 사람은 자기 시체를 팔아서 삼만원 정도를 게걸스럽게 먹다가 비참하게 총에 맞아 죽었고, 한 사람은 일만오천원 때문에 자기의 생명을 구한 겁니다.
이 두 사람의 삶을 연극으로 1막, 2막, 3막으로 나눈다면 1막에서는 둘 다 못 된 인간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는 민간인을 쏴죽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를 쏴 죽인 그런 인간으로 등장합니다.
둘이 다 같이 죽을 운명으로 등장합니다.
2막에서는 조금씩 그 모습이 바뀌어갑니다.
최후의 순간이 오더라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신자세와 가치관에 따라서 그 인생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하는 모습이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생각은 그 인생의 설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 번째 인간은 오직 육신을 채우기 위해서 탐미적인 실존으로 감각적인 만족에 끝까지 탐닉합니다.
죽음이 다가오는데도 동물적 본능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마지막 남은 생명이지만 보람된 생각을 늘 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연극의 제 3막에서는 첫 번째 인간은 지옥으로 떨어지고
두 번째 인간은 생명을 연장 받아서 수사님으로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6절에 ‘육을 따라 살려는 마음은 죽음에 이르고 영을 따라 살려는 마음은 생명과 평화를 준다.’ 하는 말이 나옵니다.
예전에 같이 살던 수녀님이 있었습니다.
사제생활 25년 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수도자들과 함께 삽니다.
수도회도 수도 없이... 본당을 옮길 때마다 수도회가 바뀝니다.
옷은 똑같이 수도복을 입었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같이 다른지.... 똑같은 수녀들이 없고, 똑같은 마음을 가진 수도자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25년 살면서 지금도 기억이 나는 수녀님이 있습니다.
그 수녀님이 왜 기억이 나느냐?
그 수녀님은 늘 밝은 표정이었고 항상 말마다
“저 행복해요. 행복해요.” 저는 물었지요.
“지금 정말 행복하냐?”
“네 정말 행복해요.”
“그 행복의 비결이 뭐냐?” 하고 물었을 때 그 수녀님은 아주 수줍은 듯이 한마디 조용히 얘길 했습니다.
“그 행복의 비결은 절대자 하느님 앞에 닻을 내리는 겁니다.”
닻이라고 하는 것은 바다위에 떠있는 배가 흘러 다니지 않게 물속에 배를 고정시키는 쇳덩어립니다.
닻의 역할은 배를 고정시키고 머물게 하는 겁니다.
“절대자 하느님 앞에 닻을 내리는 것, 이것이 제 행복한 것의 비결입니다.”
2년 동안 그 수녀님과 살면서 그 수녀님을 지켜봤습니다.
정말로 절대자 하느님 앞에 닻을 내리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 수도자는 말만이 아니라 정말로 닻을 내리는 사람 이었습니다.
첫 번째 기도의 닻을 내리고 살던 수도자였습니다.
왜 많은 이들이 육신이 배고플 때는 음식을 찾으면서 영혼이 배고플 때는 왜 기도하지 않을까?
혼란스러울 때는 전통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혼란스러울 때는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됩니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공동체도 혼란스러울 때는 딴 해법이 없습니다.
개인기도, 성체조배, 로사리오기도 이런 것이 바로 영적갑옷입니다.
이 갑옷이 귀찮다고 벗어던지면 우리는 마귀의 화살, 세속의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인간은 기도로써 강해지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기도로써 약해지십니다.
인간은 기도할수록 강해지지만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기도를 듣고 안 들어주고는 못 배기실 정도로 마음이 여려지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기도로 강해지고 하느님은 기도로 약해지십니다.
그 수녀님은 늘 기도의 닻을 내리시는 분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성체 앞에 무릎을 꿇었고, 늘 손에는 묵주가 떨어지지 않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그런 허례허식의 기도가 아니라 깊은 기도 속에서 기도의 닻을 늘 하느님 앞에 내리고 살던 분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 수도자는 순명의 닻을 내리고 사는 분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저절로 하느님께 순명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에게 순명하지 않게 됩니다.
그 수녀님은 미안할 정도로 내가 하는 말을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시키건 간에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그 수녀님을 볼 때마다
‘이 수녀님은 나보다 한수 위구나!’
순명하는 사람 앞에는 늘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저는 그 수녀님에게 ‘아~ 순명은 이런 거구나!’
늘 자극을 받고 살았습니다.
순명은 기적을 낳고 기쁨과 평화와 행복을 낳습니다.
세 번째로 그 수도자는 늘 포기의 닻을 내리고 사는 수도자였습니다.
기도하면은 순명하게 되고 순명하다 보면 포기할 줄을 알게 됩니다.
가려서 분별력 있게 포기할 줄 알게 됩니다.
영적분별력이 생기고 절대 놓쳐서 안 될 것이 무엇인지... 쓰레기처럼 하찮게 여겨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구별하게 됩니다.
그 수녀님은 몸이 많이 아픈 수녀님이었지만 자기의 십자가는 오늘 복음말씀대로 철저하게 지고 가는 사람 이였습니다.
나에게 준 십자가는 절대로 남에게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다른 모든 것은 양보하더라도 나에게 오는 십자가,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이 시련, 고통만큼은 절대로 남에게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소화데레사 성녀께서 그 어린나이지만 많은 고통을 당했죠.
스물네 살의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작은 삶이 왜 위대한 성녀의 삶으로 연결이 되었겠습니까?
소화데레사성녀의 가장 큰 덕은 작은 고통이라도 기쁘게 끌어안고 사랑했었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렇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현대의 성녀입니다.
십자가는 절대 남에게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는 내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는 거라는 하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됩니다.
많은 신자들이 늘 십자가를 지려고하기 때문에 힘에 겨워합니다.
십자가는 지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는 겁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99% 그 이유는 내가 아직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행복을 못 느끼고 있을 겁니다.
행복을 원하신다면 내가 지금 애착하고 있는 거, 갖고 싶은 거 그거를 포기하십시오.
현대영성의 위기는 하느님 앞에 닻을 내리지 않고 늘 자기 앞에, 물질 앞에 닻을 내리는데 있다고 얘길 합니다.
예전보다 많이 소유하고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지만 거기에 비례해서 영적으로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충만하게 있습니까?
오히려 없이 살 때가 더 행복했고..... 많이 소유할수록 마음은 더 불행해질 때가 많습니다.
밑으로부터 오는 이 세속적인 기쁨은 늘 우리자신을 속입니다.
짠물은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을 일으키고 손에든 물은 언젠가는 빠져나가듯이 세속의 기쁨에 너무 집착하고 살아간다면 영적기쁨은 얻을 수가 없을 겁니다.
세속의 것을 포기할 때 위로부터 영적기쁨이 내려옵니다.
버려야 할 것을 움켜쥐고 꽉 붙잡아야 될 것을 버리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생각해 봅시다.
이 미사 중에 내 마음의 평화를 가로막는 바로 그것을....
오늘 복음말씀대로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간절히 청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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