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거요!
헤르베르트는 전화를 통해 자신이 드디어 아빠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병원으로 아기를 보러 갔을 때 담당
간호사는 그를 옆방으로 안내하여 창을 통해서만
아들을 보도록 해주었다.
의사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아기가 귀가 없이 태어났어요. 또 입도 겨우 버찌씨
크기만큼만 벌릴 수 있어요. 턱뼈가 형성되지 못해서
이지요. 당장에 수술을 하겠지만 아무래도 기형아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겠습니다.
헤르베르트는 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아기의 흉한
몰골을 바라보면서 도무지 자기 아들이라는 것이 믿기
지 않았다.
헤르베르트는 울고 있는 아내와 함께 이유를 캐보았다.
이런 일이 생길 만한 무슨 이유가 있었는가? 임신 중에
충격을 받은 일도 없고, 그들 가족 가운데 어떤 유전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캐보아도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의사 또한 아무런 설명을 해줄 근거가 없었다.
하루가 지난 후 헤르베르트는 다시 병원으로 찾아왔다.
그는 눈을 빛내며 아내에게 말했다.
내 아들도 살 권리가 있소.
그 아이는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야 하오.
나는 이제 다른 이들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소.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소.
당신도 이런 성경구절을 기억하겠지?
‘그는 …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바로 이거요! 우리 아이는 이런 모습 안에 다른 특별한 걸
갖고 있는 거요. 난 믿기로 했소.
(……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거요!……)
눈물로 괴로운 밤을 지세며 헤르베르트는 불구인 아기한테서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 학대받는 참혹한 예수님을 발견한 것
이다. 그는 이 잔혹한 운명을 기꺼이 수용할 힘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매우 드문 예다. 보통의 경우, 고통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그렇게 단시일 안에 이루어
지지 않을뿐더러, 늘 새로이 치솟는 의심과 회의가 교차하는
투쟁이 계속되기 마련이다.
눈물과 탄식, 비통을 지나 끝내는 미처 깨닫지 못하던 하느님
사랑을 긍정하게 되는 곳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움튼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가 완전히 벙어리가 되어 경외감으로 머리를
숙이는 기적이 일어난다.
불구인 아이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자신의 고통을 수용하는
불치의 환자도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엄숙한 과정을 통해 오히려
건강한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또 다른 경우는 우리가 어떤 대단한 병에
걸리거나 불행에 빠졌을 때다. 이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외치게 될 것이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시편22,2)
오늘의 묵상 :
우리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를 통하여 사랑의 진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8-39참조)
이러한 처지에 놓인 분들에게는 어떠한 말도,
위로의 말도 드릴 수 없으며,
단지 조용히 함께 있어 주면서 오로지 손이나
잡아주거나 또는 그냥 함께 머물러 침묵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성경을 통하여 알도록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49,15)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저희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께 감사드리며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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