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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909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09 조회수336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9-4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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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있고, 그 종교들의 최종 목적들은 종교마다 달리 설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종교는 그저 삶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복을 받고 운을 얻는 것을 바라는 기복적인 것이 전부인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종교는 믿음의 대상이 결국 자신과 같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곧 겉으로 보면 신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 신의 단계에 오르는 것이 종교의 참 목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 신의 반열에 오르는 열반을 이야기하는 종교도 예의 극에 다다른 성인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물론 현실의 사람들의 많은 경우는 그 도에 이르기보다는 그 도에 이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사는 것에 그치고 그것을 마치 종교의 목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의 이치에 눈치 빠른 이들은 참 도를 이루는데 정진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이미 그 도를 이루었다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사람들의 약한 마음과 의지하고자 하는 습관들을 이용하기도 하며서 종교의 원래 가치를 마음대로 바꾸고 혼란시키도 합니다. 그것으로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어떤 것일까요? 아니 하느님을 믿는 종교는 무엇이 최종 목적일까요?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과 영원하 생명이라는 말들로 우리의 최종 목적지를 정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라는 말은 말 자체로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해 주셔야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최종 목적이 하느님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고 선택하셔야 구원이 이루어지고,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일이 가능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종 목적은 하느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사람으로 그 사람의 증거는 지금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 곧 '성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입니다. 


도를 이루어 하느님의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사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역시도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분의 능력이 먼저 다가오는 분입니까? 그분의 가르침이 먼저 다가오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그분의 삶이 먼저 다가오는 분이십니까? 이 모든 것은 스스로 느끼는 것에 관계 없이 모두 틀림 없는 사실이며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함께 하신 모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제자가 되고 그분처럼 살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분의 능력을 가지고, 그분의 지식과 지혜를 니니고, 그분처럼 사는 것을 말할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일입니까? 아니 하느님이 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설사 그 능력과 권위가 주어졌다 한들 그것은 스승이신 그리스도가 사신 이유가 하느님의 거룩한 삶을 사셨던 것이라는 점에서 자리를 얻거나 세도를 부리는 것의 명분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삶에서 보여주셨으며 그것으로 당신을 증명하거나 힘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삶의 방식이었을 뿐, 그분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이 능력과 권위가 모두 주어진 상태에 이르렀다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변화된 위상을 나타내는 일은 그 모든 것에 맞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그 모든 것은 주님처럼 사랑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하며 그것 이외의 목적에 사용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그야말로 탐욕에 눈먼 이가 되어 사는 것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런 이가 사람들에게 다가서면 그를 보는 모든 사람들은 그 삶의 목적이 그의 스승을 넘어서 그보다 더 능력있고 높은 이가 되는 것으로 변질되기 마련입니다. 또한 하느님은 그것을 담보해주시는 분처럼 변해버립니다. 성공한 삶을 보장하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당신께 바치는 정성에 굶주리는 분처럼 그 정성에 따라 사랑의 크기를 좌우하시는 분처럼 바뀌게 마련입니다. 


결국 그렇게 인도된 이가 가는 곳이 천국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 무시되고 강제된 영혼들이 얼마겠으며 사랑함에 가려지고 버려진 이들의 영혼을 두고 천국을 맘 편히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그가 그렇게 무시한 영혼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천국의 행복을 누린다면 그 나라에 들어갈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격이전에 자신 스스로 시도하는 것 자체가 수치스럽고 비굴한 일일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으며 사는 것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표현은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완벽한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처럼 사는 것에서 무엇을 얻기를 원하기보다 그분처럼 살아가면서 하느님이 우리를 내신 목적을 깨닫게 되고 그 삶으로써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잘못되면 사는 자체에 행복을 느끼는 일은 없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쌓았던 명성과 능력이 중요하고 그것으로 누린 권세에 더한 것을 향해 끊임없이 목말라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와 나는 언제쯤 같아질 수 있을지 궁금해하고 약하고 힘겨운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절실해 하는 것을 취하고자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부족함이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에 한계나 지겨움을 느끼면 또 다른 능력과 자리를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눈의 들보는 우리 신앙의 목적이 잘못 들어서 있음을 말합니다. 들보와 티끌은 서로 잘못된 방향을 향해 걷는 이들이 서로를 두고 경쟁하고 시기하며 살아가며 드러나는 모습들입니다. 또한 들보가 큰 사람일수록 그 들보를 걷어내는 것이 힘든 이유는 그 들보가 그가 살아가는 이유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들어내기 힘든 것이 아니라 들어내기 싫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을 겸손하라고 순수하게 알아듣는 이가 있다면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선 스승을 넘어서려 하는 제자나 그것에 눈먼 이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이끄는 곳이 눈에 보여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큰 들보를 자신에게 주신 축복처럼 여기며 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의 상징과 권세의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의 모습이 지나온 시간들에 거울처럼 드러나는 것이 불편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왜 하느님을 믿습니까? 생각해보는 하루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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