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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용서에 관한 몇 가지 진실들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10 조회수677 추천수11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1년 가해 연중 24주일 - 용서에 관한 몇 가지 진실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며 그를 설득하려했지만 그는 그것도 잘 알고 있고 자신도 죽어 마땅한 사람임도 알고 있지만 자신을 고발한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브라디의 눈빛이 빛났고 수녀는 조용히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를 용서해야 되겠다고 다짐하여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기회만 있으면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만 더해갑니다. 정말 어쩌면 좋겠습니까?”

수녀는 정중하게 문의했고 브라디는 제법 대견하게 대답했습니다.

“안되지요.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안 되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신앙생활도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하고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천만에, 그러지 마시오. 용서할 수 있도록 좀 더 힘쓰셔야죠!”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앙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던 것입니다. (참조: 디럭스 바이블 예화)

 

좀 길기는 하겠지만, 지금부터 저는 용서에 관한 몇 가지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위의 실화에서 볼 수 있듯이 용서는 서로간의 평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사형수 브라디는 자신이 살인이라는 큰 죄를 저지른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신고한 사람을 용서 못합니다. 불편한 진실 그 첫 번째는 브라디의 경우처럼 용서를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어떤 누군가에게는 내가 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은 그만큼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한 데나리온을 5만원으로 친다면 만 달란트는 3조원에 달합니다. 또 백 데나리온은 5백만 원 정도가 됩니다.

위에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수녀님은 자신의 오빠를 죽인 사람을 용서했기에 3조원에 달하는 용서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브라디도 양심이란 것이 아직 완전히 죽어있지는 않았기에 자신에게 5백만 원 빚진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 3조에 해당하는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 당신 아들을 희생시켜 피를 흘리게 해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큰 용서를 받았다면 브라디처럼 나에게 작은 잘못을 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잘못할 때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보다 내가 더 큰 잘못을 하느님께 하고 또 용서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두 번째 진실은 ‘하느님은 내 판단의 잣대로 나를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판단하여 용서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절대로 그 잣대를 가지고는 용서 받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이웃을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다시 불려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듯이 하느님은 ‘정의’상 이웃의 작은 잘못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용서해 주실 수 없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노상강도가 나옵니다. 그는 앗티카라는 지방에 살면서 자기 영지를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잡아 결박하여 자신이 가진 쇠 침대에 누입니다. 그래서 여행자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 길이대로 잘라서 죽이고, 작으면 침대 길이만큼 늘려서 죽였습니다. 그러다가 테세우스라는 영웅이 그 프로크루스테스를 잡게 되었고 그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가 가지고 있던 철 침대에 뉘여서 그가 했던 똑 같은 방법으로 그를 죽였습니다.

심판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고 자비로운 사람은 심판을 이깁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당신 잣대로 사람을 심판하면 살아남을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의 사람이 지닌 판단의 잣대로 그 사람들 각자를 심판합니다. 그것이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정의를 충족시키는 가장 공평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감옥에 갇히게 된 못된 종은 백 데나리온도 탕감해주지 못하는 매우 무자비한 잣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3조라는 빚이 있어도 그 중에 최대 500만원밖에 탕감 받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무자비한 잣대를 지닌 사람은 그 잣대로 무자비하게 심판받게 됩니다.

 

세 번째 진실은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만 괴롭다”는 것입니다. 저도 중학교 때 선생님을 매우 미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미워하면 화가 풀릴 줄 알았는데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하루 종일 미워하는 사람 생각만 났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그 사람은 내가 이렇게 미워하면서 힘들어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편하게 지낼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만 혼자 괴로워야 한다는 것에 더 울화통이 터졌습니다.

그 때 어머니께서 지나가시는 말로 “다른 사람을 눈물 나게 하려면 나는 피눈물을 흘려야 돼”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면 자신만 손해고 자신만 고통을 당합니다. 왜 우리는 돌을 맞으면 그 상처를 치유하려하지 않고 먼저 어떤 놈이 그 돌을 던졌는지 찾으려고만 하는 것일까요?

유영철에게 어머니, 아내, 4대 독자를 잃은 고정원씨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만 알게 되면 그 이후엔 한강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 살인자가 유영철이란 것을 알게 되는 데는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중에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용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영철을 용서하여 사형폐지를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를 용서한다고 결심하자 죽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용서가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자기 자신의 아픔을 감소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유영철을 용서하지 못하는 다른 피해자들 가족들은 자살을 한 가족들도 많고 갖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할 때는 죽을 만큼 괴롭지만 용서하면 마음의 평화가 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진실은 ‘남이 미워지게 되는 이유는 내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죄가 있어서 미워해야 한다면 예수님이나 성모님께서 가장 많은 사람을 미워해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당신들 안에 죄가 없기에 남을 미워하실 수가 없습니다. 남을 미워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웃이 나에게 잘못을 해서라기보다는 내 안에 이미 미움이라는 죄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를 서로 사랑하여 한 몸이 되라고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뱀이 하와를 유혹하고 하와가 아담을 유혹해 그들은 모두 죄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들게 되는 감정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입니다. 죄를 지은 양심의 가책으로 부끄러워하게 되어 자신을 가리려고 하고 또 하느님의 심판이 무서워 나무 뒤로 숨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처지가 바로 자신을 죄 짓게 만든 이들의 잘못이라고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와는 뱀에게, 또 아담은 하와에게 자신들 죄의 핑계를 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심판하며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자신 안의 양심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하기에 자신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다시 말해 남을 미워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죄를 묻어버리고 남을 심판하면서 양심의 무거운 가책과 두려움을 감소시키려는 모든 인간의 자동적인 반응입니다. 따라서 남을 미워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남을 미워하는 사람 안에는 반드시 죄가 있고 그 죄는 남을 용서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남을 조금이라도 용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면 자신의 죄도 용서받게 됩니다.

 

다섯 번째 불편한 진실은 ‘남을 용서하려고 하면 용서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즉 ‘용서는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분이 죄가 없다는 것을 넘어서 죄가 없는 이들에게 흘러넘치는 ‘성령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사랑도 용서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자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용서를 해야 하는 이유를 잘 알기에 그래서 용서를 하려고 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 해 주십시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동시에 그 사람을 미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그 기도 안에서 성령님께서 용서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고 또 상대방에게도 영향을 주셔서 화해할 수 있게 하십니다.

기름 없이 움직이는 차가 없듯이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 인간의 나쁜 본능을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고 싶다면 기도해야합니다.

한 자매님이 자살하기 직전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다행히 성지순례 중 남편을 용서했습니다. 그 남편은 술과 도박에 구타까지 일삼아 태중에 있던 아이까지 유산되게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남편을 용서하고 돌아올 때 남편은 회개하여 공항까지 아내를 마중 나왔고 지금은 술과 도박을 끊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용서하게 하고 그 용서를 하게 도와주신 성령님은 나뿐만 아니라 상대에게도 작용해 주십니다.

한 자매님은 남편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여 성체조배를 매일 한 시간씩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여자와 숨어살던 남편이 일주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또 한 자매는 일 년간 그렇게 기도하였더니 외도하는 남편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돌아와도 웃으며 따뜻한 밥과 이부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미운 것이 아니라 불쌍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만이 미움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한 웅덩이에 두 물고기가 살았습니다. 한 물고기가 너무 좁고 먹을 것도 부족해 다른 물고기가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다른 물고기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은 잠시 뿐, 그 물은 죽은 물고기 시체 때문에 썩게 되어 결국 자신도 죽게 되었습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는 10살 때 욕정에 불탔던 청년에게 수십 차례 칼에 찔려 24시간의 고통을 견디다 죽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직전 그 청년을 용서한다고 하면서 그 청년과 천국에서 함께 있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감옥에서 3년 동안 반항했지만 결국 천국에서 그를 찾아온 고레띠 성녀의 발현을 보고 회개를 하여 실형을 마치고도 평생을 수도원 정원지기로 보속하는 삶을 살다가 천국으로 갔습니다.

용서는 결국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내가 꿈꾸는 그 곳>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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