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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 -반영억라파엘신부-(마태오 18,21-3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11 조회수813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1 9 11  연중 제24주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오 18,21-35)

 

 

 분노하는 마음을 풀고 이웃을 용서하면 우리 자신의 죄도 없어진다. 우리가 마음속에 화를 품고 있는 한 주님께서 고쳐 주실 수 없다. 우리가 용서하고 화해할 때 주님 또한 우리를 용서하신다(제1독서). 신앙인의 삶과 죽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주님 안에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 주님 안에 믿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다(제2독서). 한 데나리온은 예수님 시대 노동자 하루 임금이다. 한 탈렌트는 육천 데나리온, 곧 육천 일의 노동 가치를 갖는다. 일만 탈렌트 빚은 평생 무엇으로도 갚지 못할 빚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이런 빚을 지고 사는 사람이다(복음).

☆☆☆

 

 세상에서 혼자 살기는 춥고 외롭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기에는 상대방의 가시가 너무 아픕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고슴도치를 부둥켜안고 사는 듯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 동반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면 부부 사이부터 가족, 친척, 이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 같지만 자신과 관계 맺고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수천 억 명이 살다간 인류 역사 속에 한 시대 한 지점에서 만나 삶을 함께하는 인연입니다. 이 소중한 인연으로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하며 살아도 모자라는데 그 만남들에서 숱하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상처 없는 만남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런데 상처를 많이 받고 덜 받고는 자신의 삶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내적으로 겸손하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내면에 온갖 자존심과 열등감, 욕심이 채워져 있을수록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두는 못된 종처럼 자신이 받은 은혜는 생각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자신만이 살고 있고 온갖 욕심들이 꽉 차 있으면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하며 살 때 내적인 겸손이 생깁니다. 내적인 겸손이 쌓일 때 우리는 상처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 출발은 하느님께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며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깊이 감사하고 나면 모든 이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처 받을 일도 없어집니다.

 

 

 

  나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

  -반영억라파엘신부-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를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삶에로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는 어리석을 지라도 남의 허물을 보고 꾸짖는 일은 잘합니다. 그러나 비록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 해도 자신을 용서하는 것에는 어둡습니다.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기를 꾸짖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면 좋으련만 기회만 있으면 타인을 꾸짖으려 하니 문제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한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용서를 받아왔고 또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실수와 잘못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타인의 잘못에 대해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18,21)하고 횟수를 말한 것은 그냥 억지로 눈감아주고 참아주는 한계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횟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은 ‘분노자체도 남기지 않는 용서’를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당신 친히 배반자 유다를 용서하시고 베드로에게 3 번씩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죄책감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23,34)하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도 말로는 종종 ‘용서합니다.’ 하면서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마음에는 분노와 적개심, 원한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며,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고, 끝까지 너그러이 용서한데 대한 칭찬을 돌려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리라.”(이사43,25). 하지만 이런 용서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도록 청하고 무던히 주님께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용서란 믿음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집회28,2).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집회28,5) “계명을 기억하고 네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집회28,7).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12,19). “용서한다는 것은 언제나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춤추는 것입니다.”(스미즈) 용서한다는 것은 ‘다 잊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서 더 이상 억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용서는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행했을 때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본인을 해칩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래에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용서해야합니다. 용서는 죄의 악순환을 끊어 버리고 서로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십시오! 

우리나라 사람들 중 4.2%가 화병에 걸려있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화병은 속에서 불이 나는 병입니다. 화날 일이 전혀 없는 것 같은 상황인데도 가슴 안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입니다. 상처가 뿜어내는 분노, 화, 적개심, 복수심을 내 보내지 않고 차곡차곡 쌓아둔다면 어찌 우리 몸이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분노와 원한으로 치를 떨 때 우리 몸이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상처받은 것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죽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더 억울한 것은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이가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히 용서를 청해야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덧나게 하고 스스로를 파괴할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용서하십시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원망은 황산과 같아서 그것이 담긴 그릇조차 녹인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서 미움과 원한을 움켜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집착이 얼마나 우리의 진을 빼는지 모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놈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이를 갈다가 결국은 내가 원한 속에 죽고 맙니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마음으로 해 보십시오.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이 기도를 계속 이어가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나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셔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기에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우리 자신이 허점 많고 부족한 인간이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죄를 범한 자신을 스스로 용서해 주고 결코 자신을 단죄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유다는 자기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목매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바오로...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새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의 에사오(창세33,4)나 요셉(창세45,14-15), 스테파노(사도7,60), 예수님(루가23,34)의 모습을 통해 용서한 삶의 모범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요한의 첫째 서간 2장1절에서는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제물이 되신 분의 은혜를 입고도 이웃에게는 나 몰라라 한다면 믿음의 소유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빚을 탕감 받고도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에게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송봉모 신부님은 효과적인 용서방법으로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베개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앉아라. 십자가는 용서의 강력한 상징이다. 십자가 앞에서 성호를 그은 뒤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맺힌 분노와 적개심과 한을 강렬하게 표현하라. 그놈의 자식, 죽일 놈의 새끼, 염병할 놈등등..입에서 나오는 대로 표현하라. 분노가 극에 달하고 참기 어려우면 주먹으로 옆에 놓아둔 베개를 쳐라. 분명, 잘못은 잘못이다.

2). 증오심에서 벗어나 맺힌 한을 풀고 싶다는 바람을 말씀드려라. 화병에 걸리고 암에 걸려 더 이상 억울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말씀드려라. 나의 억울함을 사람들에게 호소하며 동정을 구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려라. 그 사람도 악의 세력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해 봐라.

3).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라.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한을 품지 않고 사랑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우리가 겪은 어떠한 불의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사건보다 더 불의하지는 않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울부짖으셨던 주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어찌하여?’라는 물음은 주님의 ‘어찌하여?’를 통해 치유된다. 

4). 상처를 준 사건 속에 예수님을 초대하라. 그 이유는 과거의 상처에서 치유되기 위해서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한테도 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에게 아픈 기억, 슬픔. 실망. 상처만을 남겼는데 함께 걸어가면서 아픈 체험을 다 들어 주셨고 그들의 상처에 사랑으로 응답해 주셨다. 상처의 기억을 치유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예수님의 눈으로 우리 과거 사건을 바라 보아야한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믿음에 따르는 신앙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상처의 한 가운데 주님의 십자가를 놓으십시오. 먼저 하느님 앞에 허물이 많은 인간임을 인정하고 또 많이 용서 받아왔음을 고백하며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에서도 불구하고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용서를 청할 수 있는 은총과 더불어 용서할 수 있는 넉넉함을 주실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1요한1,9).

물론 맺힌 한을 푸는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처가 크면 클수록 더 그렇습니다. 따라서 그 상처로 더 이상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까지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가 용서하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용서하셨음을 감사합니다. 혹시 상처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의 잘못이냐고 따지지말고 그 사람을 도구로 쓰셔서 나를 성화시켜주시는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구엔 반 투안 추기경)

“우리가 제비꽃을 밟으면 제비꽃은 우리 발뒤꿈치에 좋은 향기를 남긴다. 용서는 그 향기와 같다.” 사랑합니다 !!! 

http://cafe.daum.net/rara63/bmQo/494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주님께서 허럭하신
풍성한 추석 되세요
 
교형자매님 가정마다
행복이 넘치시길 빕니다.
 
사랑 합니다.
 
 
 
 
~로마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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