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가해 십자가 현양 축일 - 구원에 이르는 길
강원도 평창의 성 필립보 생태마을의 관장님인 황창연(베네딕도) 신부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는 암환자들을 위한 집들도 마련되어 있는데 가끔 말기 암 환자가 치유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환자들에게 특별히 ‘감사’를 생활화할 것을 권한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감사할 것이 전혀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조금씩 더 감사의 말을 많이 하게 되고 몇 년씩 더 살게 되는 것은 기본이며 급기야 기적적으로 암세포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대부분의 병은 스트레스로부터 온다고 생각합니다. 또 스트레스란 ‘불평스러운 일’을 겪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평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그것은 스트레스가 되지 않고 몸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과 영혼을 죽이는 것이 ‘불만’이라는 스트레스입니다.
저도 여러 명의 암 환자들을 만나보았는데 하나같이 남편이 바람피우거나 자녀를 잃는 등의 힘든 시간을 겪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만이 쌓이다보니 그것이 몸 안에서 암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죽이게 한 이유가 그들이 하느님께 ‘불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괜히 끌어내어 마실 물도, 맛있는 음식도 먹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불평을 쏟아 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세례를 받고 나서부터는 주일에 마음 편하게 놀러가지도 못하고, 성당에 돈도 내야하고, 쉽게 남을 속일 수도 없고, 쾌락적인 것도 절제를 해야만 하기에 어떤 때는 성당 나오게 된 것에 대해 후회스러운 마음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죄는 어떤 행위를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불만스런 마음이 생기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이런 죄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높이 달린 구리 뱀을 보고 치유 되었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며 치유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더 이상 불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불만스런 마음을 감사로 바꾸어주는 치유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십자가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고 그래서 우리 죄가 치유되고 구원받게 되었는데, 그 십자가를 보며 우리가 어떻게 불평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솟구칩니다. 이것이 곧 치유요 구원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 와까야마 지방 출신의 해군 장교인 가와가미 기이찌는 종전 후 귀국하게 되었는데, 고향에 돌아와 보니, 국내 상태는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으리만큼 처참했습니다. 그래서 불평불만만 가득 품고 살아가는 중에, 그만 전신이 굳어져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희귀한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도 치료방법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 때 와까야마에 있는 정신 치료사 후지다씨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매일 밤 ‘감사합니다’를 억지로라도 만 번씩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날부터 자리에 누운 채로 하고 싶지 않은 감사의 말을 억지로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아들이 두 개의 잘 익은 감을 나무에서 따서 “아빠, 이거 드셔보세요.”라고 손을 내밀었고 가와가미는 ‘고맙다.’라는 말과 함께 손을 내밀어 그 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몸이 풀리게 되어 완전히 치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조: 다음 블러그, 사선암)
이렇게 억지로라도 감사를 하면 치유가 일어나는데 우리 신앙인은 억지로 감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십자가만 바라봅시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힘드셨던 만큼 힘들 수 없습니다. 결국 그 분의 피로서 우리 영혼이 구원받는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불만을 감사로 바꾸어 주는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뱀의 형상으로 나무 위에 달리신 것입니다.
성당이나 집에서 십자고상을 볼 때마다 적어도 한 번만이라도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립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