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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의 어머니 -반영억라파엘신부-(요한 19,25-2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15 조회수522 추천수11 반대(0) 신고

2011년 9월 15일 목요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16세기부터 시작된 대중 신심이었다. 9월 셋째 주일에 미사와 행렬을 하던 것을, 166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축일로 인가하였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다음 날인 9 15일로 날짜를 확정하였다. 예수님과 함께하시면서 겪으신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자 오늘의 축일이 제정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요한 19,25-27)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아버지께 순종하며 받아들이신 분이시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우리도 그분께 순종하며 우리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질 때 그분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된다(제1독서). 십자가 곁에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계신다.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곁에’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심을 나타낸다. 아들 예수님의 죽음의 고통은 그대로 어머니의 고통이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신 예수님의 발아래 어머니 마리아께서 서 계십니다. 비통한 모습으로 아드님을 바라보시는 어머니께 주님께서는 위로를 보내십니다. 죽어 가는 아드님을 바라보고 계신 어머니께는 어떠한 위로도 소용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께 그윽한 눈빛으로 위로를 보내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는 순간,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프셨을 겁니다.
흔히 사랑하는 님은 앞산에 묻고, 사랑하는 자식은 가슴에 묻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드님의 죽음 앞에서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그 어떤 말도 위로의 말로 들려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어머니요 형제들이다.”라고 하신 아드님께서 마리아에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셨을 때, 성모님께서는 그 어떤 말보다 아드님의 그 한마디 말씀에 온갖 고통〔七苦〕이 한순간에 사라지셨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드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모 마리아의 자녀들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을 바라보시던 그윽한 눈매로 이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겁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극히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받드시듯이, 그렇게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성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모님을 모셔 줄 것을 청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머니

 -반영억라파엘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세상을 떠나시면서 아들의 역할을 다하고 계십니다.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을 이제 제자들이 다해 주기를 바라며 어머니를 맡깁니다. 또한 어머니께서 당신 제자들을 아들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어머니와 제자, 제자와 어머니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됩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제자들에게“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요한 19,26-27) 하심으로써 어머니를 제자들의 어머니, 믿는 이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하고 이행한 것입니다. 이제 성모님은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집회서를 보면“마음을 다해 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어머니의 산고를 잊지 마라. 네가 그들에게서 태어났음을 기억하여라. 그들이 네게 베푼 것을 어떻게 그대로 되갚겠느냐?”(집회7,27-28)고 적혀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함으로서 어머니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곁에 서 계신 어머니의 고통이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어머니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하느님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급기야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게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아들의 시신을 안은 동상에 ‘피에타’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피에타’는 이태리어로 ‘충실한 믿음’을 뜻합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온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원하고 그대로 따른 “충실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충실한 믿음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묘비에도 ‘피에타’ 라고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에 고통 안에서 믿음을 드러내신 어머니를 통하여 ‘고통이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십자가의 성 요한)라는 것을 일깨우시기 바랍니다.

 성모님은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크나큰 고통을 감당하셔야 했는데 흔히 일곱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실 분이며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라는 시므온의 예언입니다.(루카2,34-35) 2).헤로데를 피하여 ‘에집트로 피난을 가셔야 했습니다.(마태2,13-18) 3).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으신 고통(루카2,41-51) 4).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서로 만나신 고통(루카23,26-32) 5).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보신 고통(요한19,38-40) 6).예수님의 성시를 품에 안으신 고통(요한19,41-42) 7).예수님의 성시를 돌무덤에 장사지내심을 보신 고통(요한19,41-42)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성모님의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으로 바치셨고 하느님이 당신의 전부였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거울삼아 자진하여 고통을 참아 받으며 하느님과 이웃에게 희생의 제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고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수난을 함께 나누고 예수님께 대한 우리 사랑을 보여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마더 데레사) 그러므로 “여러분의 생각은 언제나 성모님께서 울고 계시던 구세주의 십자가 곁에 머물도록 하십시오. 항상 성모님과 함께 울도록 하십시오.”(교부 푀멘) 십자가위에 높이 달리신 당신 아드님 곁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함께하신 어머니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여 마침내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케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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