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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15 조회수945 추천수18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1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Standing by the cross of Jesus were his mother
and his mother's sister, Mary the wife of Clopas,
and Mary Magdalene.
When Jesus saw his mother and the disciple there whom he loved
(Jn.19,25-26)
 
 
제1독서 히브 5,7-9
복음 요한 19,25-27

전에 어떤 장소에서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에서 젊은 연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을 보았는데 너무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니 유치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네요. 여자 친구의 썰렁한 유머에 남자 친구는 박장대소를 하고, 남자 친구의 과장된 몸짓에 여자 친구는 폭소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더군요.

솔직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부끄러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저렇게 유치한 말과 행동에 웃어젖히는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니까요. 사랑하니까 상대의 말과 행동이 다 의미 있고 또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사랑하는 연인들이 하는 이 말과 행동을 만약 텔레비전에서 보여준다면 “왜 저런 유치한 것을 보여 주냐?”면서 항의전화가 쇄도할 것입니다. 유치해도 사랑을 하면 재미있으며, 부끄러운 행동도 사랑하면 오히려 자랑스러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눈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으며,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역시 사랑의 눈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의 삶을 요약한다면 한 마디로 ‘고통’ 그 자체일 것입니다.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산후 조리도 하지 못하고 에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지요. 또한 외아들 예수님을 성전에 잃어버리는 체험도 하셨고,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하느님 곁으로 보내는 이별의 아픔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들의 죽음은 성모님의 삶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가를 잘 깨닫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아들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무력감. 그리고 아들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렸을 때의 슬픔.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갖지 않으십니다.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연약한 몸으로 그 모든 고통을 받아내시지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모습이지요. 이렇게 모든 고통을 이겨내실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이겨내기 힘든 고통의 순간에서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생각해봅니다. 내 자신은 과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있을까? 혹시 세상의 기준으로만 살려고 했었고, 세상의 기준에서 어긋나면 과감하게 다른 길을 선택하는 세속적인 모습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랑하면 바보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도 스스로를 바보라고 칭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 역시 사랑 때문이라면 바보도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바보라고 불리어도, 주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바보로 사는 우리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주실 것입니다.

 

미성숙한 사람은 ‘당신이 필요해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성숙한 사람은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한다.(에릭프롬)



 

도둑맞지 않는 법

이정표만 잘 보면 길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정표가 되어주시죠?

저의 학창 시절에 아주 유명한 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올림픽에서도 많은 금메달을 따고, 또한 각종 세계대회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던 미국의 칼 루이스가 바로 그였지요. 그런데 얼마 전 어떤 책에서 그가 유명한 육상선수가 되었던 이유를 보게 되었습니다.

칼 루이스가 살았던 도시는 교통 상황이 너무 나빠서 교통지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나쁜 교통 상황 때문에 차보다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녔지요.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교통수단인 모터사이클을 도둑맞은 것입니다. 그는 대신 자전거를 샀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도둑을 맞았습니다. 화가 난 칼 루이스는 다시는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사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매일 12킬로나 되는 먼 길을 뛰어다녔답니다. 왜냐하면 어떤 도둑도 달리기만은 훔쳐갈 수 없기 때문이었지요.

이렇게 매일 빠짐없이 뛴 결과 세계적인 육상선수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만약 그가 고통에 그냥 순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습니다.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버리고, 훔쳐간 사람에 대해서 미움의 감정만 가지고 있었다면?

고통에 무너지라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극복하라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고통의 끝에는 커다란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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