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25주일 2011년 9월 1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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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9-16 | 조회수360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25주일 2011년 9월 18일
마태 20, 1-16
오늘 복음은 어떤 포도원 주인이 아침 6시에 나가서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약속하고 일꾼들을 고용하였습니다. 그가 아침 9시에 나가보니, 아직도 일을 얻지 못한 일꾼들이 있어서 그들도 자기 포도원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12시, 3시, 5시에도 일이 없어 서 있는 사람들을 자기 포도원에 보내어 일하게 하였습니다. 저녁에 품삯을 주면서 주인은 늦게 온 사람들에게도 아침 일찍 온 사람들과 같은 일당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관념에는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공로에 준해서 베풀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아침 일찍 포도원에 와서 일한 사람들은 일당을 받고, 주인에게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 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은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 마지막 말씀을 어떤 번역은 ‘내가 선하다고 해서 당신의 눈길이 사나워지는 거요?’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베푸신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냉혹한 우리의 정의에 얽매인 시선은 사납다는 말입니다. 준만큼 받아야 하고, 받은 만큼 주어야 하는 세상의 관행은 우리를 사납게 만듭니다.
대가(代價)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베푸는 것을 무상(無償)으로 베푼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무상으로 베푸셔서 시작된 우리의 생명입니다. 부모님이 무상으로 우리를 키웠고, 우리 주변의 많은 분들이 대가 없이 우리를 위해주고, 도와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명은 무상에 감싸여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무상이 흘러서 발생하고 존재하는 이 세상의 생명들입니다. 하느님은 무상으로 베풀지 않으신다고 반론을 펼 수 있습니다. 돈에 궁했을 때, 병들었을 때, 하느님에게 기도하였지만, 하느님은 돈도, 건강도 주지 않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하느님이지 우리의 해결사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돈에 궁하듯이, 또 다른 사람들이 병고에 시달리듯이,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은 무상의 베푸심이 있었다는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철이 들고 이해타산(利害打算)을 배우면서, 무상이라는 것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 사회를 우리는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척도를 하느님에게도 적용하여, 하느님도 우리가 바친 만큼, 또 공로를 쌓은 만큼, 포상하는 분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무상으로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옛날에 도입된 고해성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을 통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고백하는 부끄러움 당하고, 보속이라는 대가를 치러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용서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용서를 우리의 척도에 맞춰 재단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관행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에서, 하느님은 곤경에 처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무상으로 베푸신다는 사실을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을 베푸는 선하신 분으로, 또 우리 생명의 기원이신 아버지로 알아듣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우리의 생존이 은혜롭게 베풀어졌기에, 우리도 베푸는 생명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정의(正義)입니다.
하느님은 죄에 대해 벌을 주고, 많이 바치는 자에게 많이 주신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가 그렇게 가르쳤고, 오늘도 그렇게 믿어야 안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행을 기준으로 하느님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지키고 바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베풀고 용서하는 은혜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어린 자녀가 부모를 신뢰하고 부모로부터 배워서 사람이 되듯이, 우리도 하느님께 신뢰하고 그분으로부터 은혜로움을 배워, 은혜로움을 실천하며 살라고 예수는 가르치셨습니다.
산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 상쾌합니다. 높은 산 깊은 숲에 들어가면 대자연의 포근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은혜롭게 느껴집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상쾌하고, 그렇게 포근하고 또한 그렇게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우리의 욕심을 외면하지 못해서, 하느님 앞에 늘 불안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혜택을 주고, 그들만 예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불쌍히 여기고, 모든 이에게 베푸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나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작은 마음에서 해방되어,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나의 자유 안에 살아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우리도 베풂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사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에게 기꺼이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재산을 팔아 자선을 베푸시오.”(루가 12, 32-33). 신앙인은 두려워서 하느님에게 빌고, 자기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노예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심판하지 않고, 우리의 생존을 무상으로 준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일이 없어, 곤경에 처한 생명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 같은 임금을 주어 살도록 하는 포도원 주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배려를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에 대해 배우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들의 모임인 교회가 성당을 화려하게 짓고, 아름다운 전례를 하고, 헌금을 많이 모아도,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빙자한 높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군림한다면,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은 보이지 않고, 높고, 많이 가지고, 강하겠다는 ‘사나운 눈길들’만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어떤 형태로든 은혜로움이 실천될 때, 하느님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생시킬 사명을 띤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베푸심이 살아 있는 교회 공동체라야 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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