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천국을 희망하며 -반영억라파렝신부-(루카9,23-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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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1-09-18 | 조회수449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루카9,23-26) 천국을 희망하며 -반영억라파렝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사랑의 승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살아야 할 때입니다. 이 시간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놓으신 순교자들의 삶을 생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1784년에 세워진 한국천주교회는 백여 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를 계속 받아서 순교자만도 만 명이 넘습니다. 17세기 초부터 서양의 학술 서적들이 북경을 오가는 사절단에 의해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마태오 릿치가 한문으로 저술한 ‘천주실의’가 진리에 목말라하던 소수의 실학자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교리를 하나의 학문으로 연구하였으나(천주학, 서학) 차츰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교리를 연구하던 몇몇 남인 학자들은 마침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는 이승훈에게 교리를 더 배워오게 하였고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서 이벽,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벽은 이승훈이 가져온 서적들을 연구한 후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786년부터 지도급 신도들은 북경의 교회제도를 본 따서 주교직과 사제직을 맡아 교회의 발전을 꾀했는데 이것이 ‘가성직제도’입니다. 2년간 계속되었으나 그 타당성에 의심을 품고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 결과 이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조선교회는 성직자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의 천주교 수용은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찾아 나선 조선인 스스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이하고 또 자랑입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천주교는 하나의 종교로써 받아들여졌고 신도들의 집회도 잦아졌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천주교는 사상적, 사회적, 정치적인 이유에서 박해를 받았는데 사상적으로는 유교의 양반 사상과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마찰을 빚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전통적인 사회질서에 위협을 초래하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당파싸움의 방편으로 천주교가 이용당하게 되었습니다. 두드러진 박해를 보면, 1791년 신해박해로 유교문화에서 중시하던 ‘신주’를 불사라 버린 것이 발각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박해에도 불구하고 경상도와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의 신자수가 4,000명에 이르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주문모 신부님과 3백여 신자들이 순교함으로써 1834년 유방제 신부님이 입국할 때까지 조선교회는 성직자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열성과 기도로 1831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파리 외방 전교회가 전교를 맡게 됨으로써 신자수가 9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천주교가 사교라는 편견하에 ‘척사윤음’을 반포하고 종전보다 적극적이고 강력한 탄압을 가했습니다. 1845년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신부는 기해년 옥중 생활에 대해 “교우들은 조그만 감옥에 빽빽이 처넣어져 제대로 발을 뻗고 누울 수조차 없었다. 그들은 고문보다 옥중 생활이 더 지긋지긋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멍석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와 고름으로 푹푹 썩어가고,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였다. 이로 인해 병에 걸려 죽은 교우도 많았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형벌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무서운 고문을 참아내면서도 이 때문에 배교하는 교우들도 적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을 보면서도 우리는 신자요, 여기 그 증거가 있지 않소? 하며 묵주를 내보이고 자수하여 죽음을 자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박해 중에도 신자수는 늘어나서 약 1만 명에 예비자가 6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1845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이 귀국하게 되었으나 1년 만에 순교하게 되었고, 철종 임금 즉위 후에는 교회에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 신자 수는 2만 3천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년에는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 탄압을 시작하였습니다. 아홉 명의 성직자와 8천여 명의 신자들이 희생당하였으며 이후 십년 동안 조선교회에 성직자가 없었습니다. 쇄국정책을 펴오던 조선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고 1886년 한불통상조약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 받게 되었습니다. 1893년에는 서울 약현성당(현 중림동)이 한국 최초의 양옥 성당으로 준공되었고 1898년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모임을 갖던 명례방 김범우의 집터에 명동 성당이 들어섰습니다. 2010년 말 한국 신자수는 5,205,589명에 이르렀고, 성직자는 4,300명입니다. 수도자는 약 1만 명이 됩니다. 우리 청주교구는 성직자 170여명, 수도자는 남자, 80명, 여자 500명, 신자수 151,458명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활발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은 “정령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루카9,23-26)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사신 분입니다. 신앙에 충실하기위해 목숨을 내 놓음으로써 하느님을 몽땅 차지하신 분들입니다. 순교자들은 사형수가 되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기쁨이 넘쳤습니다. 망나니의 칼 앞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환난이나 역경, 박해나 굶주림, 헐벗음도 위험도 칼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로마8,35) 신유박해 순교자 이순이 누갈다는 옥중수기에서 “눕거나 앉거나 구하는 바는 오직 치명의 은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해성 요한은 ‘배교하면 한 고을을 통째로 주겠다.’는 회유를 거절하였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는 “나는 천주교인이요,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이오.”하면서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막달레나는 배교를 강요하는 관원에게 “천주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민의 아버지이십니다. 어찌 임금과 아버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만 번 죽을 지라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관원이 “천주를 보기나 했더냐?” 하고 물었습니다. 막달레나는 “시골 백성은 임금님을 뵙지 못했어도 계신 줄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천지 만물을 보고 천주님이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며 형벌을 받아들였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 하고 천국을 희망하며 목숨을 바쳤습니다. 순교자들의 행동에 대해 지혜서는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지혜3,3-5) 결국 그들은 믿음의 싸움을 잘 싸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1티모6,12)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입니다. 그 후손의 몫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요즈음은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간혹 신앙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고 욕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주저 없이 신앙을 선택하는 것이 순교자적 정신입니다.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하고 또 말씀대로 행해야 하며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세상이 풍요로워질수록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협할 거리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다하는 것인데, 나만 이러면 손해 보는 데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고, 이권과 그리고 명예와 재물과 취미생활, 위신체면에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주님을 차지해야 합니다.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에게 자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지혜3,9). 묵시록 2장10절에서는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박해가 아니라도 불이익이나 비난을 감수할 줄 아는 믿음을 새롭게 다져 생명의 화관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일상 안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길 희망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젊은 화가 한 사람이 대 선배에게 자기고민을 호소했습니다. “선배님,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2~3일이면 그림을 한 장 그려낼 수 있지만 그게 팔리기까지는 이삼년이 걸리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자 그 선배는 “그까짓 걸 갖고 뭘 걱정하나? 그림 한 장을 이삼년 동안 그려보게. 그러면 2~3일 안에 팔릴 테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그만한 수고와 땀이 없이 결과만을 가지고 부러워하고 시샘 하는 경우가 있고 빠른 성공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파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뼈를 깎는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야 명 작품을 만들 수 있듯이 우리의 믿음도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빛나게 됩니다. 사랑합니다. http://cafe.daum.net/rara63/bmQo/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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