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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충만한 삶 - 9.18,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18 조회수400 추천수10 반대(0) 신고

2011.9.18 연중 제25주일

이사55,6-9 필리1,20ㄷ-24.27ㄱ 마태20,1-16ㄱ

 

 

 

 

충만한 삶

 

 

 

요즘 22년 전 서품식 때 찍은 가족사진을 보면서 많은 것을 묵상합니다.

22년 사이에 어머님과 세 형님이 모두 돌아 가셨는데

사진에는 다 젊고 건강해 보입니다.

‘아, 이게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이겠구나.’ 묵상합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사진 안 모습은 영원한 젊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묵상하던 중,

전에는 전혀 생각지 못한 소스라치게 깨달은 사실입니다.

외로움이었습니다.

어머님과 세 형님들은 내색은 안하셨지만

나름대로 ‘삶이 퍽 외로웠겠다.’ 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말 못 할 사연은 얼마나 많았을 런지요.

 

외로워서 사람입니다.

서로 외로운 사람들이란 자각에서 샘솟는 연민과 공감의 사랑입니다.

예전 아빠스님이 스치듯 하던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공동체는 환상이다. 결국은 혼자다.’

함께해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실존적 외로움의 운명을 타고 난 너나 할 것 없이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소통이 만병통치약처럼 회자되는 세상이지만

소통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외로움의 불통은 그대로입니다.

하여 10 년 전 써놓고 위로 받는 시가 생각납니다.

 

“삶은/외로움을/견뎌내는 것.

  외로움 중에도/묵묵히/꽃들 피어 내는 것

  하늘이/별들 피어내듯/땅이 꽃들 피어내듯”

 

시에서처럼 묵묵히 외로움을 견뎌내며

사랑의 꽃들 피어내며

삶의 의무를 다하셨던 제 어머니와 세 형님들이었습니다.

 

외로워서 사람입니다.

외로워서 하느님입니다.

사람만 아니라 하느님도 외로워서 사람을 찾습니다.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저는 하느님의 외로움이 깨달음처럼 떠올랐습니다.

아무에게도 그 자비를 이해 받지 못하는 하느님의 외로움입니다.

루카 복음 15장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역시 큰 아들에게 그 자비를 이해 받지 못하는 아버지에게서도

똑같이 느꼈던 하느님의 외로움이었습니다.

사람들 한 가운데에 계시면서도 이해 받지 못해 외로우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외로움은 바로 우리를 찾는 외로우신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외로움이 그리움으로 직결되어 하느님을 찾아 만날 때

외로움은 충만한 기쁨으로 변합니다.

오늘은 외로움 중에도 묵묵히 사랑의 꽃들 피어내는

‘충만한 삶’에 대해 나눕니다.

 

 

 

첫째, 주님께 돌아오십시오.

 

주님께 돌아올 때 충만한 삶의 시작입니다.

늘 시작은

우리 삶의 제자리인 하느님께 돌아가 자기를 찾는 회개로 부터입니다.

우리의 근원적 외로움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초대장입니다.

외로움의 깊이는 바로 자비의 깊이입니다.

외로움의 깊이에서 만나는 자비하신 주님이십니다.

이사야가 이 점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만나 뵐 수 있을 때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바로 지금 여기 가까이 만나 뵐 수 있을 때

주님을 찾고 부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저기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십니다.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자리이고 나의 자리입니다.

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회개요,

끊임없이 제 길을, 제 생각을 버리고 당신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께 돌아왔을 때 일체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시고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역시 자비하신 주님의 다음의 초대에 응해

이 수도원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네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우리에게 안식을 선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둘째, 주님께 배우십시오.

 

주님께 끊임없이 배우며 살 때 충만한 삶입니다.

공자의 삼락(三樂)이 생각납니다.

공자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達方來 不亦樂乎(유붕이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로

바로 배움으로부터 진리를 얻는 기쁨,

좋은 친구를 만나는 기쁨,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갖는 기쁨의 삼락을 말합니다.

 

주님께 진리를, 자비를 배우는 기쁨이 우선이고

이와 더불어 자연스런 도반들과 우정의 기쁨과

흔들림 없는 마음을 지닌 기쁨으로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군자라, 하느님의 자녀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승이신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자비를 배워야 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삶터가 주님의 자비를 배우는 학원이요,

그의 가시적 주님의 교실이 바로 이 성전입니다.

여기 사는 우리 수도승들 매일 이 성전 교실에서

하루에도 일곱 차례 들어와서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의 자비를, 온유와 겸손을 배웁니다.

 

여러분들 역시 주님께 배우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미사 중 말씀과 성무일도 시편의 찬미와 감사 기도보다

더 좋은 하느님 공부도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배우면서 주님의 뜻에, 주님의 생각에, 주님의 자비에

우리의 코드를 맞추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에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이래서 하느님 공부입니다.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은 그대로 우리 생각과,

우리 길과 같지 않은 하느님을 잘 보여줍니다.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상식의 잣대, 인과율의 잣대, 세상 정의의 잣대로

하느님의 자비를 잰 자에 대한 주인의 질책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래서 하느님은 외롭습니다.

불통으로 인한 외로움입니다.

내 입장에서가 아닌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렸어야 했습니다.

 

일없는 가장들이 걱정이 되어

아침 일찍 한 번의 고용으로 끝내지 않고

아홉시, 열두시, 오후 세시, 오후 다섯 시 등

수차례에 걸쳐 거리를 떠도는 실업자들을 완전 고용하시고 

많은 식솔을 거느린 가장의 처지를 생각해

노동시간에 관계없이 한 시간 일한 일꾼에게도 일당을 지불한

선한 포도밭 주인을 통해 하느님의 넓고도 깊은 자비를 배웁니다.

 

하느님 자비의 공부는 졸업이 없고 죽어야 졸업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교실인 이 성전에서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찬미와 감사기도를 드리며 주님의 자비를 배우는 우리들입니다.

 

 

 

셋째, 주님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배움은 삶으로 직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그리스도와 일치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때

충만한 삶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그 모범입니다.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은 것이 이득입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내 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죽고 싶어도 주님 때문에,

형제들 때문에 살 수뿐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그대로 구현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일 때 그대로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위의 새 성경 번역 보다는 저는 공동번역을 선호합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1,21ㄱ).

‘그리스도’ 대신 그 무엇을 넣어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전 저의 후배 신부의 서품 상본이었고,

 성소가 흔들릴 때 마다 그리스도 대신

‘여자’ ‘돈’ ‘명예’ ‘권력’을 다 넣어 봤어도

마음에 차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넣었을 때 비로소 마음의 안정과 평화였다

합니다.

 

 

 

충만한 삶으로 초대 받는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주님께 돌아오십시오.

주님께 배우십시오.

주님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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