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따뜻한 자궁 속 세상을 전부로 여기고 행복해 하던 어린아기에게 눈 부신 태양빛이 날카롭게 시신경을 파고 들어오는 이 세상으로의 첫 나들이는 말 그래도 두려움 그 자체였겠지......
엄마, 아빠의 음성을 비롯한 외부의 여러가지 소리들과 엄마 뱃속을 뚫고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제외하고는 거의 은폐되어 있었던 이 세상에 태어난 뒤 그 어린 아이는 성년으로 자라나면서 서서히 또 다른 여행을 떠날 차비를 차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새로운 여행은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피안으로의 여행이 될 것이기에 누구나 처음에는 엄청난 두려움을 갖지만 태중의 어린 아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이 여행에 대해 선택의 여지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다. 영원은 이 세상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 여행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이 날 것인지 알지 못한다. 이 여행은 그 시작부터가 이 세상것이 아니라 '절대'요 '영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여행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사실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나는 영원의 차원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것 뿐이지만 그것 조차 쉽지 않으니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여행을 잘 떠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이 여행을 잘 떠나는 사람을 난 보지 못했다. 세상 것에 욕심을 두지 않고 홀가분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우리가 매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내일, 내일 당장 우리는 그 여행을 떠날 사람들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 뿐이다.
당장 내일 절대와 영원의 차원으로 여행을 떠날 사람이 가져야만 하는 유한한 인간들의 현세에 대한 욕심이라는 것을 단 한가지라도 말 해 줄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당장 만나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철저히 버리고 나서야 우리들의 삶은 '너에게 바쳐지는 삶', '진리와 하나되는 삶', '절대와 영원이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삶'으로 변화될 수 있다.
나의 모든 것을 너를 위해 바칠 수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우리들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이어져야 한다. 영원한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나를 완전히 버리고 너를 위해 철저히 바쳐지는 그리스도들로 인하여 완성될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진리와 하나가 된 사람들, 그리스도의 운명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사람들, 다시 말해 세상에서 고통받는 '너'를 위해 '나'를 죽인 모든 사람들은 철저하게 은폐된 여행을 떠나면서도 결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은폐된 세상으로의 여행도 아무런 두려움없이 떠날 수 있는 믿음이 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영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유다인들을 향해 '내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신다.
유다인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래 당신이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훌륭하단 말이오?"
"정말 잘 들어두십시요. 나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유다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하자 예수는 그들을 피하여 '떠나 가셨다'.
우리는 이미 이 예수의 여행(떠남)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욕심을 버려라......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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