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영의 눈
작성자김혜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20 조회수624 추천수10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2011년 가해 연중 25주간 수요일 - 영의 눈

 


 

세종대왕 때에 청렴결백한 정치가로 유명했던 맹사성은 항상 허술한 옷차림의 촌부의 모습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성묘 차 온양을 다녀오는 길에 비를 만나 용인의 어느 여관에 들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는 영남에서 올라오는 호화로운 선비의 행차가 있었으므로 맹 정승은 방을 얻지 못하고 낭하 한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 바둑을 좋아하는 선비의 요청으로 대청마루에 올라 바둑을 두게 되었는데, 서로가 신분을 알 수 없는 초면이므로 상대방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맹 촌부가 먼저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 말할 때 묻는 말에 마지막에 공을 붙이고 대답 끝에는 당을 붙이기로 하자”고 하였더니 선비는 “서울로 간당”하고 대답했습니다. 관심이 생긴 맹 정승은 다시 묻기를 “무슨 벼슬이공?”하였더니 선비는 “녹사취재 벼슬이당”했습니다. 그래서 맹 정승은 “내가 힘써 줄공?” 하였더니 선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자네 같은 촌부는 택도 없는 소리당”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환담을 하다가 선비는 서울로 올라와 과연 녹사취재 벼슬을 얻게 되어 3정승 6판서가 모인 정청으로 신고 차 방문을 했다. 6조 판서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선비를 본 맹 정승은 “어찌된 일인공?”하고 말을 건넸습니다. 낯익은 목소리에 선비가 얼굴을 들어 바라보니 금관조복의 좌의정이 바로 그 촌부였습니다. 전날, 촌부인 줄로만 알고 무례하게 대했던 선비는 정신이 산란해져서 말하기를, “죽을죄를 지었당”하고 맥없이 대답했습니다. 그 후 이 선비는 맹 정승의 지도로 청백한 관리가 되었다는 사화가 있습니다. (참조: 다음 블로그, ‘사랑의 기쁨’)

 

‘사람’은 눈에 보이는 ‘육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육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힘에 부치더라도 커다란 차를 타야하고 좋은 옷을 입어야 하고 귀금속으로 치장하게 만듭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런 환경이기에 위와 같이 겉만 보고 판단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운동장 한 구석에서 운동복을 입고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이라고 하시는 분이 여러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운동장을 돌아가며 인사를 하고 다녔습니다. 선거철이 곧 다가올 때였습니다.

저는 먼저 일어나 기다렸다가 몸을 90도로 굽히며 고생하신다고 인사드렸습니다. 젊은 사람이 그렇게 인사하니 그 분은 보통 인사를 받을 때처럼 똑바로 서서 그저 “네, *** 시장입니다.”라고만 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한참 다른 쪽으로 인사를 가시다가 한 사람이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고 그 시장은 황급히 저에게 뛰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90도로 굽히며 “아니, 신부님이십니까? 너무 젊어서 몰라 뵈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부담스럽게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한 표를 가진 보통 사람인데 그렇게까지 자세가 변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장난기가 발생해 좀 전과 반대로 뻣뻣이 서서 손만 내밀고 “네, 전삼용 요셉 신붑니다.”라고 응수하여 받은 대로 돌려주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결코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리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세리란 로마에 세금을 거두어 바치는 사람으로 매국노요 커다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당신 사도로 부르십니다. 육체를 지니시기 전의 예수님의 본래 모습은 ‘영’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4, 24).

육체를 보는 것은 육체의 눈이고, 영혼을 보는 것은 ‘영의 눈’입니다. 영의 눈은 성령의 힘으로 육체를 꿰뚫어 그 육체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실체를 보게 합니다. 우리가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보면서 그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영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도 아나니야의 안수로 인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영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어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코린 2, 11)

사람의 생각을 아는 것은 사람의 영이고, 하느님의 생각을 알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겉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의 본질인 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사람을 볼 때도 결코 그 겉모양이 아니라 성령의 눈으로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을 보려고 해야겠습니다. 시선이 육체에만 머무르면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이고 그 육체를 꿰뚫어 영혼을 볼 수 있어야 영적인 신앙인입니다.

 

< 그대를 향한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