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가해 연중 25주간 목요일 - 나를 죽이려 해요
성당에 부임한 지 며칠 안 되어 새벽 3시경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침대 머리맡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병자성사를 청하는 건가?’ 생각하며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전화에서는 60대 전 후반 되어 보이는 한 아주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신부님이시죠? 늦은 밤에 죄송해요.”
“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이 인간 좀 어떻게 해 주실 수 없나요? 절 죽이려 해요. 몇 일째 잠을 못 자게 해요. 경찰에 신고까지 했는데 그 사람 편만 들어줘요. 어떻게 해야 하죠, 신부님?”
저는 남편이 그렇게 괴롭히는 줄 생각했습니다.
“아~ 글쎄요?”
“이 인간이 어떤 때는 집에 가스를 틀어놓고 나가버려요. 요즘은 음식에 독을 타요. 그게 사람입니까? 그러면서 저를 사랑한데요.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 인간 옷 벗었죠?”
저는 이 분이 온전한 정신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군데 옷을 벗죠?”
“신부요, 저 세례 준 신부예요.”
“이름이 어떻게 돼요?”
그 분은 자신이 세례 받았던 본당 이름과 저희 교구 원로 사제 한 분의 이름을 정확히 말했습니다. 저는 그 분이 옷도 벗지 않으시고 오산이 아닌 다른 곳에 잘 계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요? ... 큰 수확이네요. ... 근데 옆집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요. 젊은 부부가 사는 것 같은데 그 인간이 절 죽이라고 그 사람들을 돈을 주고 사서 거기서 살게 하는 거죠?”
저는 이 분이 매일 새벽에 이런 전화를 걸어오지나 않을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정리하고 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니에요. 그 분들은 좋은 분들이고요, 그 신부님도 그렇게 하실 분이 아니니까 안심하시고 주무셔도 돼요. 또 어려운 일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아셨죠?”
이렇게 말하고 인사를 하고 나서 전화를 끊고 바로 전화선을 뽑아버렸습니다.
병명으로 따지자면 아마도 ‘피해망상증’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해를 입힐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헤로데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한 세례자의 목을 가져오도록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헤로디아가 원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헤로데는 헤로디아 못지않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의인으로 여기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그 의인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없앨 수 없는 개인 법정이 있습니다. 바로 양심입니다. 이 양심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잘못한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누구에게 잘못을 범했다면, ‘내가 해를 입힌 상대방에게 나도 똑같은 해를 입어야 당연하다’고 일러줍니다. 간단히 말하면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해를 입힐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화를 건 자매님도 실제로는 아무 상관도 없는 한 신부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믿습니다. 그 자매님은 어쩌면 그 신부님을 좋아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신부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신부님이 자기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했을 것입니다. 개인의 감정으로 한 명의 사제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제는 한 개인을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분은 그렇게 하느님과 한 사제에게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못을 범하고 있기에 또한 그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두려운 존재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죄를 짓고 하느님이 두려워 나무 뒤로 숨습니다.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들은 하느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임에도 그렇게 믿을 수 없는 것은 각 개인의 양심이 이미 하느님을 자신을 심판하고 벌주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을 두려워 한 나머지 그 분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의 심판은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바로 잡혀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가시적 용서만이 그 양심의 심판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만큼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혼자 눈물을 흘리며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도 양심은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용서하는 권한을 교회에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성사를 통해 그 분이 나를 해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피로서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신다는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