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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월 23일 금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23 조회수815 추천수19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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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금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루카 9장 18-22절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고통과 십자가의 가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 사도께서 정답 중의 정답, A+에 해당되는 모범답안을 제출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이 보다 더 명확한 답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그리스도가 어떤 그리스도이신지 보다 명료하게 설명하십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광과 승리, 존귀와 위엄의 메시아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고난 받는 메시아이십니다.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메시아, 사람들 손에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높이 매달리는 수난의 메시아이심을 강조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고통과 십자가를 피해가는 메시아가 아니라 고통과 십자가를 끌어안는 메시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고통과 십자가는 반드시 학점을 따야하는 필수과목이자 기본교과목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 없듯이 십자가 없이 구원 없습니다.

 

    한계를 지닌 유한한 인간, 갖은 결핍을 끼고 사는 부족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고통과 십자가 없는 신앙, 아무런 굴곡 없이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하는 삶은 솔직히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비오 신부님의 다섯 상처 앞에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호기심에 찬 눈초리로 몰려들었고,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고, 환호하고, 경외심을 갖고, 고해를 청하고...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비오 신부님 입장에서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특별한 현상 앞에 교회는 늘 신중하기 마련입니다. 좀 더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좀 더 차분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교회는 비오 신부님을 위한 특별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소 성당에서 외부인 참례 없는 미사만 집전, 편지 답장쓰기 금지, 미사 외 모든 성무 집행 정지 등.

 

    오상으로 인해 비오 신부님께서 받으셨던 끔찍한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다섯 상처를 간직했던 50년 세월 동안 매일 흘렸던 피는 찻잔으로 한 잔 정도였습니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비오 신부님, 얼마나 아프세요?” “얼마나 아프냐고요? 굵고 네모난 못을 손에다 대고 망치로 힘껏 때려 박은 다음에 그 못을 뺑 돌려 보세요. 꼭 그만큼 아파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50년 동안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던 수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그 끔찍했던 고통을 매일 겪으며 살아가셨습니다. 매일 고통 속에 사셨기에 고통 받는 환자들,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큰 연민의 정을 지닐 수 있었고,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통한 수많은 사람들의 치유요 기적이었습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오상의 비오 신부님처럼 고통과 십자가에 담겨진 보화와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 아닐까요? 고통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것,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부활을 희망하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오상의 비오 신부님처럼 나도 고통스럽지만, 내 십자가도 무겁지만, 나보다 더 고통스럽고, 나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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