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저녁 성시간 때의 일이다. 여느 때와는 달리 콜롬비아 출신 알베이로 신부님이 기타를 치면서 저녁기도며 성체찬미 등 모든 전례를 노래로 이끌어갔다.
그런데 알베이로 신부님의 노래 실력이며 기타 연주 실력이 놀라웠다.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다보면 실수로라도 한 소절쯤은 음정이 맞을 법도 한데 정말 신기에 가까운 실력(?)으로 기타 연주와 노래 음정이 따로 놀았다.
기타는 말 그대로 손바닥을 펴서 ‘치는’ 수준이었고 찬미가는 도대체 책을 읽는 건지 노래를 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판국에 나머지 신부님들이 도저히 맞추질 못하고 멍하니 가만히 있는데도 알베이로 신부님은 혼자 찬미가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내가 놀랄만한 일은 오히려 성시간이 끝난 다음에 일어났다. 연세 드신 할아버지 신부님들이 어느 한 분 싫은 기색 없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표정으로 알베이로 신부에게 다가가서 등을 두드리며 ‘멋진 노래’로 성시간을 이끌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한마디씩 건네셨다. 연세가 드셔서 귀가 어두워 이렇게 해도 혹은 저렇게 해도 잘했다고 하시는 걸까?
저녁을 먹으면서 한 할아버지 신부님께 여쭈어봤다.
“신부님, 오늘 저녁 성시간 좋으셨어요?”
“응, 좀 색다르게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것도 좋지. 허허허......”
“그러셨군요. 전 솔직히 알베이로 신부님의 노래 때문에 성시간 자체에는 집중하지 못했거든요.”
그러자 옆에 앉은 원장신부님이 한마디 거드셨다.
“최 신부, 우리는 알베이로 신부의 노래를 들은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들었어. 사랑하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바치는 한 젊은 신부의 사랑 고백을 들은 거지. 너무 아름다웠어.”
“네에, 원장 신부님. 그렇군요. 그럼 알베이로 신부에게 다음 성시간도 준비하라고 할까요?”
“최 신부, 음...... 어서 밥먹지.”
사람들 사는 일은 겉으로 드러난 결과가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그 드러난 결과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동기의 순수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나 순수한 동기였는가 하는 차원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눈에 보이는 단편적인 결과만을 가지고 전체 일을 판단해 버린다.
하느님은 어떤 일의 결과보다는 그 일을 수행하게 된 동기와 수단을 더 눈 여겨 보실 것 같다. 최후의 심판이 철저하게 하느님의 영역인 이유로 모든 인생의 최종 결과는 우리에게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다. 인생의 최종 결과는 하느님과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들에게만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생에서의 우리들 인생은 동기와 수단이 엮어내는 끝을 볼 수 없는 드라마이다.
사람과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그러한 동기의 순수성과 수단의 정당성을 볼 수 있는 주님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순수한 동기와 정당한 수단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아름다운 실패를 보지 못하고 불순한 동기와 부도덕한 수단이 빚어내는 성공적인 결과만을 보는 우리들은 사실 눈먼 봉사나 다름없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른다.
눈을 떠라!
“사람들이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하고 묻자 그는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시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시기에 씻었더니 눈이 띄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요한9,10-11)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9,41)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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