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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925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24 조회수325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9월 25일 연중 제 26 주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8-32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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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하느님을 믿는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조차도 모두가 한 가지 단어를 입에 올립니다. "사랑"이 그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을 아는 모든 이들은 "사랑"을 알고 있고,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누구나 그 사랑이 옳고 바른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또한 배워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는 것과 실제 사는 것 사이에 생각보다 큰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안다고 말하지만 실제 그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에 있어서는 꽤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만은 아닌 듯 보입니다.

그리스도교가 형성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습에서도 이런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현재 교회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에 있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을 학문으로 발전시켜 그것을 교리로 틀을 세우고 규칙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또 배우는 견고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말이 아닌 글로 남아서 오랜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은 가르침의 내용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어렵지 않게 그 교리를 배울수도 공부할수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누구나 아는 말이 된 듯 교회의 교리들로 전해지는 하느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현실이 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아는 것은 같은데 사는 모습은 너무나 다릅니다. 글도 같고 그 안에 적혀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 일 뿐인데 예수님을 따르고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우리의 실제 삶은 왜 이런 차이를 보일까요? 잘산도 못산다의 차이가 아니라 삶에 있어서는 살아가는 기준 자체가 다른 듯 보여서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한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다른 삶을 사는 것은 분명 가르침이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그 가르침에 대해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가르침이 하나이기에 가르침을 의심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렇다면 그 가르침을 우리 삶에 놓고 어떤 생각을 가지는가가 가장 큰 차이의 이유인듯 보입니다.


여기 하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이 가르침에 두 아들의 대답은 갈립니다.


‘싫습니다.’
‘가겠습니다, 아버지!’


성급하게 글을 마지막까지 생각하면 이 대답과는 달리 아버지의 뜻을 따른 것은 맏아들입니다. 그는 싫다고 말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밭으로 향했고, 작은 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가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삶이라는 분명한 결론을 가지고 있지만 문제는 이 두 아들이 왜 이렇게 결과가 갈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포도밭에 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아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해 아들들의 태도는 두 번 갈라집니다. 첫 번째는 대답에서였고, 두 번째는 실제 그 일을 했느냐에서입니다. 일의 결론은 분명 맏아들이 인정을 받았지만 첫 번째 대답에서는 분명 맏아들이 부족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렇게 갈렸을까요? 그들에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아버지의 밭에서 일하는 것이 주어진 사명이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명한 일 앞에서 서로의 감정은 다릅니다.

맏아들은 그 일은 알지만 하기 싫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길을 걷기 싫다는 의사표현이요, 그 일이 힘들어보인다는 판단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생각을 바꾸었다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밭으로 갑니다. 그는 대답에 있어서 거절함으로써 부족하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밭으로 가지 않는 모습에 실망스런 모습으로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움직여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너무나 쉽게 시원하게 가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의 결론을 보면 그의 대답이 신중하지도 고민도 없었던 듯 가볍게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대답이 시원하게 나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내가 알고 있다는 표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실제 그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내린 결론은 자신은 그 일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긴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자신은 못한다고 자신에게 그 실천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에 대답이라도 충실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아버지의 지시였습니다.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치는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았습니다. 바뀐 것은 두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서로 뒤바뀐 모습이었지만 결국 맏아들은 실천을 했고, 작은 아들은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물으신 것은 대답이 아닌 실천이었습니다.

가르침이 잘못이거나 바뀌지 않았다면 그 실천에 하느님 말씀은 목적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얼마나 잘 아는가, 잘 연구하는가?, 공부하는가, 그래서 어떻게 대답하고 말씀드리는가가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살 수 있는가 없는가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의 핵심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는 한 아버지를 섬기지만 삶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현실에 있습니다. 만약 그 차이가 삶이라면 우리는 복음 속의 실천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야기 속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간혹 그리스도인들의 불성실한 신앙생활이나 잘못된 삶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책을 내어 놓을 때,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과 그것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삶이 어지러워졌다는 말들을 많이 하곤 합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성경 공부의 열풍이 불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예전보다 성경에 대해 모른다는 말도 수치상 많이 줄어들었고, 기도회나 모임 등은 그 수효나 내용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한 고민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이미지는 여전히 좋다고 하나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습에서 나온 것인지 사회의 모습 속에 상대적인 기대치나 평가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말하는 냉담이나 성당에서의 활동 등은 아주 기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냉담자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늘어나 있다는 것은 교회의 문제가 될만큼 널리 알고 있는 사실이고, 교회 재정이나 주일을 지키는 신자들의 수효의 변화에 대한 위기감에 대한 대처와 노력은 늘고 있는데 비해 신자들의 일상 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강조되는 일은 드문일입니다. 오히려 세상 살이 힘들다며 신자들을 위로하고 죄에 대해서나 생활의 사소한 잘못들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더 옳은 가르침이 되어가고 세상의 편한 삶의 행운들을 하느님께 꿈꾸게 하는 식의 세상의 선악과 행복의 기준으로 신앙의 기준을 섞어 버리는 일들도 흔하게 생기는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지겹도록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에게 주어질 만큼 단순하고 분명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글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시고 증명하신 것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도밭으로 가라는 말씀을 글을 읽거나 귀로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길과 삶까지도 아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 말씀에 "예"라고 대답하라고 이야기를 듣지만 실제 그 삶은 그리 쉬운 삶처럼 보이지 않아서 대답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주저하는 마음을 바꾸는 것이 올바른 길일 듯 싶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실천은 그분의 뜻을 더 잘 헤아린다고 그 방법이 쉬워지거나 더 뜨겁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포도밭의 일손이 일분 일초가 급한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서 바로 즉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네"라는 대답은 "알고 있습니다"라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발걸음이라는 것을 알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내리신 결론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그리고 가슴 한편으론 걱정이 됩니다. 삶에서 좌절하고 스스로 잘못을 지어 죄인으로 떨어진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 말씀에 마음을 되돌리고 그 길로 먼저 나서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몰려든 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내 몰리고 떨어져버린 소외된 이들의 삶의 현장에서 발견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아직도 하느님의 뜻에 대해 기쁜 대답에 매달리고 있습니까? 왜 나는 대답을 잘 못할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입을 닫고 달려갑시다. 아버지의 밭으로 말입니다. 실천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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