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28“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29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30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31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32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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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가 주님의 뜻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굳셈을 허락해 주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하느님을 아는 것과 그 실천은 사람이 지닌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앎은 완고함을 불러올 뿐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2327절)에 이어지는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본문의 후(後)문맥은 “다른 비유를 들어보아라.”(33ㄱ절)하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3346절)로 전후 문맥이 서로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에 대한 일차적 청중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23절)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의 권한이 어디서 오는지를 추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누구로부터 받은 권한인가를 반문하여 그들의 말문을 막은 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28ㄱ절) 하시며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똑같이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28절) 하고 일렀을 때, 두 아들의 즉각적인 대답은 순종과 불순종으로 드러납니다. 맏아들의 불순종은 한순간 아버지를 상심하게 했지만, 그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감’으로써(29절) 아버지의 상심한 마음은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응답만 했을 뿐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은 작은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실망은 그 아들이 ‘네’라고 순종했을 때 얻었던 기쁨을 뒤엎는 결과가 되었습니다.(30절)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은 두 아들의 ‘싫습니다.’와 ‘가겠습니다.’라는 단순한 응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포도밭에 ‘일하러 갔는가, 가지 않았는가.’ 하는 실천적 행동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포도밭’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스라엘’(이사 5,17; 예레 12,10 참조) 또는 ‘하느님 나라’(마태 20,16)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바라는 ‘아버지의 뜻’은 “의로운 길”(32절)에 있습니다. 지혜문학에서 ‘의로운 길’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생활방식을 뜻합니다.(시편 1,16 참조)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의로운 길’을 어떻게 받아들여 행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녀들이 유다의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ㄷ)고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은 사람들에게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길을 닦으라고 외쳤습니다.(3,23 참조) 세리와 창녀들은 요한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를 믿고 회개했지만 유다 지도자들은 요한이 전하는 의로움의 길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기 전에 먼저 ‘의로운 길을 가르치는’ 요한을 거부했던 것입니다.(32절) 또한 그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면서도 깨닫기는커녕 요한의 말을 끝내 믿지 않았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과 요한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21,11.26.46),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의로움을 이루는”(3,15) 분들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요한은 함께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며(3,2; 4,17) 선교사명을 수행했습니다.(12,34; 23,33) 그러므로 요한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예수님께 대한 태도가 되고, 이것은 곧 하느님께 대한 태도가 됩니다. 따라서 요한에 대한 거부는 예수님에 대한 배척이 됩니다.
제1독서에서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628)라고 합니다. 비록 죄인이라 일컫는 세리와 창녀들이라 할지라도 요한이 전하는 의로움의 길을 받아들여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에 그들은 유다 지도자들보다 먼저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31ㄷ절)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구세사 안에서 하느님의 예언자로 파견되어 ‘의로운 길’과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요한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배척했기에 생명의 길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주겠습니다.”(야고 2,18) 하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믿음은 이념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유다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우리의 믿음이 생활화되기를 촉구하십니다.
묵상(Meditatio)
예수님께서 그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ㄷ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먼저’라는 우열 앞에 ‘어떻게 그들이….’라는 사고의 기준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어떻게 그들이….’라는 ‘편견’은 이웃과 우리를 가르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뿌리 깊은 편견은 이웃을 배제할 뿐 아니라 하느님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이웃의 선행보다 악행을 먼저 보고, 선행에 대한 찬사보다 악덕에 대한 기억만을 고집합니다. 이는 “가겠습니다.”(30ㄴ절) 하고 하느님을 향해 가지 못하는 빈곤한 믿음의 발로일 것입니다. 이웃을 받아들이지 않고 소외시키는 마음에는 하느님의 자리도 없다는 것을 제 마음의 터전에서 다시 만납니다.
기도(Oratio)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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