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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927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27 조회수302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1-56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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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이제 이 세상에는 하느님이란 분을 들어보지 못해서 모른다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물론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리고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한 곳의 사람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구촌이라는 말이 당연해진 지금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이라는 말을 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고 많이도 듣지만 신앙의 대상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 다종교 국가여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마치 한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취미활동처럼 기호에 따라 선택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까지도 빈번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회. 이 사회에서 신앙인의 입장에서 비신앙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그들을 복음 전파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어서 그 정도가 약하긴 하지만 우리가 신앙인이기에 비신앙인들에게 가지는 생각이나 평가는 그리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구원의 가능성을 하느님께 돌리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어떤 일들이 생기면 그것을 바로 신앙과 연결시키는 일에 익숙합니다. 그들에게 생기는 불행이 있다면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며 이것이 선교의 좋은 방법으로까지 연결되곤 합니다.

그들에게 생기는 불행은 정말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차별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세상의 불행의 영역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은 하느님을 믿음으로서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들의 선택에 대해 우리의 잔인한 표현들은 과연 하느님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환경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환경이라는 것이 하느님을 어떻게 느끼게 해 줄 것인가에 따라 하느님은 순수한 신앙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많은 경우 그 사회의 삶에 따라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기도 하시지만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듣고, 그분의 핵심이 사랑이라고 말을 듣지만 사회적으로 그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면 상대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불행의 배경이 되는 경우들도 있고 그 행복과 불행이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해석되고 나면 하느님은 사랑하시고 행복과 축복의 주인공도 될 수 있지만 반면에 사람을 신앙이라는 기준으로 사람을 없이 살게 하고 불행하게 벌을 주시는 일방적인 편견의 무섭고 잔인한 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 속에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핏줄을 타고 나서도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들의 근본에 부정적인 시선을 받아 한 곳에 모여 살며 하느님에 대한 어떤 자비나 인정도 받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자신들의 한 조상을 이스라엘과 야곱으로 달리 불러야만 하는 사람들, 그들 안에서 하느님은 분명 자신들을 저주시킨 장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전혀 받아보지 못한 하느님을 듣고, 보고, 느꼈지만 예수님의 마지막 장소로 선택하신 곳이 예루살렘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일종의 충격과 허탈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역시 예수님도 그들을 업신여기는 이스라엘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 거부감을 가지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길에 들어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마을,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드러난 잘못이요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잘못 새겨진 천국의 일그러진 모습이었습니다.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을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킨다는 이유로 내버린 사람들이 그리는 천국이 어찌 사랑의 세상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엄연한 현실은 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길에서 사마리아를 품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은 그래도 이스라엘 사람이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죽음을 향해 가시는데, 이미 이스라엘이 죽여버린 하느님의 사람들과 같은 운명을 걸어가시면서도 그들을 품지 못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들을 이렇게 만든 이들의 생각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처음부터 잘못된 연결고리로 하느님에게조차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진짜 이스라엘 사람의 소리입니다. 그들을 불살라도 된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하느님을 끌어들여 이야기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야기에 소름이 돋습니다. 예수님께 배운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무리 밖의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것을 넘어 잘못된 위치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입니다. 결국 그 생각이 사마리아와 이스라엘의 비극을 만든 모양입니다.


제자들을 꾸짖으신 예수님은 결국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당신을 십자가로 내밀고 마는 이스라엘은 결국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처럼 죽였습니다. 제자들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하느님의 사람이어서는 안되며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 사람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말하며 죽였습니다. 자신들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사마리아인들을 민족의 수치쯤으로 여기며 한 곳에 몰아 살게 하고 사람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고 말을 섞어도 죄가 되는 더러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에 하느님의 아들도 역시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피할만큼 이스라엘의 편견은 무서웠습니다. 자신들처럼 죽어가는 그리스도를 끌어안지 못하는 사마리아인들. 그들의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그리 잔인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제자들의 모습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말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세상을 맡기며 구원을 꿈꾸는 우리들이 이해하고 따라야 하는 것은 우리만의 구원이 아닌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세상이 이루어지길 함께 바라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해야 합니다. 우리와 같은 곳에서 하느님을 믿고 손을 모으지 못하는 이들의 처지의 이유를 이해하고 하느님을 먼저 아는 이로서의 기쁨으로 그 사랑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으로서의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그들이 모르는 하느님에 대해 아는 사람의 진정한 모습은 그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모습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사마리아인들과 죄인들을 사랑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밀어낸 그 마을을 돌아지나치시며 예수님이 괴씸하다 마음을 품으셨겠습니까? 그런 그들이 예수님 부활의 기쁨에서 제외되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당하시는 그 편견의 죽음에 이미 심판받은 이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의 소식이 그 마을에 들렸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진심에 그리고 이스라엘의 본 모습을 다시 한 번 깨달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편견은 어울리는 말이 아닙니다. 부족함에서 온다고도 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부족함 속에서 하느님을 알고 부족함을 채우고도 남는 사랑 때문에 구원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그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누구에게나 어디에로든 흐르는 그 구원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참사랑"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았다고 내가 그것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나를 통해 더 넓어지고 더 길어져 누구에게든 흘러가야 한다고 깨닫는 순간 우리는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을 사랑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마리아를 다시 만들지 맙시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 그들을 대하는 식으로 결국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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