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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교의 낮춤(오체투지)과의 식별 [작은 자]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27 조회수393 추천수1 반대(0) 신고
 
 
 
끊어버리려는 (낮아지려는) 모든 것들에
도리어 의지가 묶여버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은
자신을 편태하는 고행의 길이 아니다.
 
십자가의 길은 아버지의 사랑을 실행해 가는
낮은 자의 자기 버림(자기 내어줌) 이다.
 
그리스도교(기독교)는 인간의 욕정을 없애기 위해 
자기 몸의 고통의 고행을 수행하는 종교가 아니다.
 
만일 신앙의 욕망을 위해 고행한다면 (끊어버리려고 하는 고행)
고기의 감흥에 맛들린 게걸들린 짐승과 다를바가 없다고 말한다.
 
사랑의 실천은 '자기 수행'(오체투지)에서 보다는
적극적으로 '자기를 내어 주는' 십자가의 길에서 이다.
 
기독교는 자기 수행의 종교가 아니다.
무소유의 자기 고행의 신앙이 아닌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불교의 무소유를 완성하며
동시에 하느님의 뜻(아버지의 사랑)을 실행해 간다.
 
그것은
자기 수행에서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착한 사마리아인 처럼
"가서 행하는" 것이다.
 
 
 
 게시자 <완전한 가난> 글 참조
 
 
성경 속의 가난
 
◆ 가난 ◆ 가난이란 물질적 결핍보다는 청빈(淸貧), 소박(素朴)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복음삼덕(福音三德)의 하나로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생활을 의미하며 이 때에는 물질적 결핍의 관점보다는 물질적 소유욕망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 즉 스스로 취한 단순 소박한 생활모습이다.  -가톨릭대사전.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행복의 첫째 조건 (산상수훈) = 정치경제적 측면에서의 세상 구조적인 모순에 의해서 발생하는 그런 '가난한 약자'가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과부'(비록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내어 주는 참된 가난한 자)에서 처럼 예수님께서는 "마음(영)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
 <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서 >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서>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 안에 집착을 끊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해서 믿음, 희망, 사랑과 같은 천상의 것들마저 집착이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집착에는 언제나 자신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사실 모든 것을 버려서는 안된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과 조화로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오로지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
 
모든 것을 없애는 것은 생명이 아닌 죽음 뿐이다. 모든 것에 생명이 살아 나도록 감미로운 숨결을 불어 넣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을 모든 것을 없애는 파괴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 안에 얽매여 있는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육정과 욕심이 지나치면 세상의 것들을 자기 소유로 삼아서 결국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 줄 수 있고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덜 가지려고 노력할 수 있을 때에 영혼은 육정의 온갖 사욕에서 떨어질 수가 있다.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짐이 된다고 하여 벗어나고자 이것들을 없애 버리려고 한다면 그것들은 언젠가 다시 되돌아와서 자신을 한순간에 덮쳐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결코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없앤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자기 안에서 자신을 비워 '모든 것'들로 감싸 안을 때 이는 없애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생명을 주는 것이며 '모든 것'에 사랑이 풍성해 지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린다 할지라도 모든 것 안에 있는 자신(목숨 마저)을 결코 버리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하였다(얽매였다)는 뜻이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 안에 자신을 속박시켜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 안에 자신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 안에 모든 것이 담아져 있는 것이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모든 것(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을 다스려야 한다. 모든 것 안에 자신이 들어 있다면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들에 지배를 받는 것이다.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께 유혹하기를 세상 영광(여기서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유혹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영광을 거절하였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은 예수님 자신 안에 담겨져 있으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탄은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말하면서
세상 모든 것 안에 예수님을 속박시켜(들어오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지배하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로 자신 안에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이 모든 것을 없애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조화가 아닌 파괴는 생명이 아닌 죽음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 안에 자신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자신 안에다 모든 것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겸손한 자세이다. 자신 안에 겸손으로 만물을 포용하는 것은 만물의 다스림이지 만물의 지배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영광( 모든 것 안에 들어가는 것 )을 거절하셨던 것이다.
 
세상 영광, 모든 것들 안에 들어가면 세상 영광(모든 것들)에 도리어 지배당하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께만 경배드리며 '당신의 모상'인 사람을 사랑하러 오셨다 (사랑의 탄생 - 사랑의 구현). 겸손으로 만물을 가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만물의 모든 것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희생으로 모든 것들이 생명으로 넘치게 하셨다.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없애는 파괴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모든 것들에게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평화의 생명을 이루게 하는 '자기 자신의 버림' 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세상)에게 영광을 받고자 아니하셨다. 자신에게 참으로 영광을 주시는 분은 오직 아버지 하느님 뿐이시다. 자기 자신의 목숨마저도 그렇게 아낌없이 내어 주신 이같은 '무소유'의 참된 가난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람은 마침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다. 성체적인 삶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의 빈무덤은 모든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무덤 마저도 소유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가난으로써 도리어 풍성한 은총(부활의 생명)으로 돌려 받는다는 것을 우리 주님이신 당신께서 남겨주신 행적으로 말미암아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성체적인 생명의 삶을 사랑으로 살아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에게서 성덕의 빛이 오지요. 자신의 '어둔 밤'은 자신의 수덕에서 거쳐 지나는 것이지만 만일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빠진다면 이 '어둔 밤'은 영혼의 동물적인 탐식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자기 안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께 집중(순수 그리스도) 함으로써 그분께서는 영혼들에게 자신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 안에 사랑(그리스도의 십자가)이 소용돌이 치지 않으면, 인간적인 것(욕과 맛)들만이 자기 안에 꿈틀거리고 자기 자신만 커져만 가게 됩니다. 자기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미(자애심)입니다.
 
'비우고자 하는 자신'이란 곧, '자기(자아)가 있다' 는 뜻입니다. 어떤 자아인가 ? '비우고자 하는 자아' 자체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비움(버림)이 아닙니다. '비우고자' 하는 자아는 사실 '비우지 못하는' 자아에 묶여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자기 비움'(자기 버림) => '완전한 가난' => '자신을 비우는게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는 것' 뿐입니다.
 
남에게 주는 것이지요. 성인(십자가 성 요한)은 우선 우리의 감각적인 것('비우고자 하는 자기')을 영적인 것(하느님의 은총에서 오는 모든 영적인 것)들에로 집착(집중)시킬 것을 권합니다. 욕망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욕망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본성적인 욕망들에 반대되는 것(곧, 영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함으로써 욕망들에 대해 대항을 행하여야만 한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성인께서는 신덕(믿음)으로 이성이 정화되고 망덕(희망)으로 기억이 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애덕(사랑)으로 의지가 정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셨는데 이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가르침이다고 봅니다. '자기 비움'은 욕망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끊어버리려는 모든 것들에 도리어 의지가 묶여 가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거저 성모님 처럼 그리스도를 따르기만 하면 되지요.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나(사람) 가운데'를 거니시게 됩니다. 아무런 응답하지 않으시는 침묵하시기도 합니다. 단지 '나 가운데'를 거니시는 것입니다.
 
재물을 가진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나누어주고(자신을 버리고) 그후 나를 따라라'하신 말씀에서 사랑의 실천은 재물을 '악'으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재물에 묶여 있는)를 버리는 것을 말함입니다. '비우고자 하는' 생각 그 자체도 자신이 묶여 있는 재물과 다를바 없습니다. [ '비우고자 하는 자신' = '비우고자 하는' 것에 묶여 있는 자기 ]의 자애심이지요.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런 자애심마저 끊어버리는 '순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억으로 파악될 만큼 형(形)과 상(象)을 지니지 않으시므로 기억이 하느님과 합쳐져 있는 경우에 형도 상도 없고 상상도 없어져서 망덕(그리스도와 일치)으로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갈망하면 기억은 오직 최고 선(하느님)에 빨려든 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게 됩니다. 단지 '나 가운데'를 거니시는 것(그리스도의 이행)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며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받아 들이는 것을 겸손, 순종이라 합니다. 아버지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처럼 자기 영혼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가 이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도만 하신 분이 아니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따름은 그리스도의 삶( 그분의 그대로 )이 됩니다. 기도는 삶이고 삶은 기도가 되어 서로 일치되어 집니다.
 
결론적으로 <완전한 가난>이란  '가진 것이 완전하게 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내어 주는 것' 입니다. 완전한 자기 버림 = 자기가 완전하게 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자기를 주는 것. 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완전히 '자기를 내어 주심'입니다. 성체를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난, 자신을 거저 내어 주는 행동(완전한 표현)을 뜻합니다. 단순히 없는 것이 가난이라 하지 않고, 단순히 자기 없슴을 비움이라 하지 않으며, 거저 주는 가난함, 거저 자기를 내어 주는 비움이 [ 완전한 가난, 완전한 비움 ]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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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가난> 이란 
'가진 것이 완전하게 없는 것'이 아니라  /  '완전하게 내어 주는 것' 입니다
 
 
완전한 <자기 버림> 이란
자기가 완전하게 없는 것 아니라  /  완전하게 자기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인간' ( "인간 계시" )을 말합니다
 
 
 
 
 
2008년7월10일 시작,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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