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생활] 교회의 기초를 놓은 두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이달의 같은 날에 교회가 성대하게 기념하는 위대한 두 성인이 있다. 교회에 신앙의 기초를 놓은 두 사도, 곧 사도들 가운데 으뜸이요 첫 교황이 된 베드로 성인과, 이방인의 사도라 불린 바오로 성인이다. 교회의 두 기둥과도 같았던 이들은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순교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시대의 중심지인 로마의 주보성인이 되었다. 오늘날 세상 곳곳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을 맞이하듯, 바티칸 대성전의 광장 양편에 세워진 두 사도의 커다란 성상은 교회의 역사에서 다른 방법으로 서로를 보완해 준 그들의 역할을 묵상하도록 초대한다. 한 손에 열쇠를 움켜쥐고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반석’을 뜻하는 베드로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울 것을 약속하시며 맡기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상징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8-19). 한편 바오로 사도의 손에 들린 칼은 주님의 사도로서 이방인의 세계에 복음을 선포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과 영적 투쟁을 상징한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11-13.17). 교회는 언제나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모습 안에서 교회의 단일한 시작과 기초를 바라보았다. 축일의 역사 교회가 한날에 위대한 두 성인을 기념하는 이 축일의 기원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초세기의 성인 공경의 영향으로 4세기에 이미 로마에서 6월 29일에 두 성인의 축일을 지냈음을 알려 주는 옛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다. 4세기의 한 순교록에 따르면, 이날 교황이 집전하는 전례는 두 성인의 순교와 밀접히 관련된 세 장소, 곧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과 로마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 그리고 박해 시기에 한시적으로 두 사도의 유해를 안치하고 보존했던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의 카타콤바에서 거행되었다. 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성인의 명성과 함께 이 축일이 서방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면서 두 사도의 순교 기념은 하나의 거행 안에 결합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증언은 두 사도를 동일한 전례적 공경으로 기념해 온 교회의 오랜 전통을 보여 준다. “이 두 사도들의 순교는 같은 날에 기념합니다. 이 두 분은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른 날에 순교했지만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가고 바오로가 뒤따랐습니다. 사도들의 피로 우리에게 거룩하게 된 이 축일을 경건히 지내고 그들의 신앙과 생활, 그들의 수고와 고난, 그리고 그들의 증거와 복음전파를 공경하도록 합시다”(「설교집」, 295,7-8). 이 축일의 중요성은 5-6세기의 전례문을 담고 있는 「베로나 성사집」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성사집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의 천상 탄일”(In natale Apostolorum Petri et Pauli)이라 명명된 이날의 미사를 위해 무려 스물여덟 개에 달하는 미사 전례문들을 소개하고 있다. 7-8세기를 거치면서 이날의 축일 거행에 조금씩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 날에 거행되었던 두 성인의 기념이 차츰 분리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날 두 대의 미사를 거행하고자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을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어려움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12세기에 이르러 교황은 6월 28일 저녁에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전야 기도를 주례하고 다음 날인 29일 아침에 두 대의 미사(새벽 미사와 낮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6월 29일 저녁에 성 바오로 대성전으로 이동해 다시 전야 기도를 바치고 다음 날인 30일 아침에 또 한 대의 미사를 봉헌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쇄신에 따른 1970년 「로마 미사 경본」과 함께 이러한 구분이 폐지되었고, 하나의 축일로서 전야 미사와 낮 미사 두 대의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다. 참된 회심을 통해 결합된 두 사도 평범하게 살 수도 있었을 두 사람을 무엇이 주님의 사도로 변모시켰을까? 그리고 삶의 배경이나 성장 과정, 성격과 가치관 등 모든 면에서 달랐던 두 사도를 하나가 되게 하였을까? 베드로는 가파르나움의 어부 출신으로 단순하면서도 거칠고, 열정적이면서도 충동적이며, 자신감이 넘쳤지만 동시에 나약한 인간이었다. 바오로는 고상한 지성인으로서 유다인 가운데 유다인, 율법을 지키는 데에도 흠잡을 데 없는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엘리트 코스를 정식으로 밟은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겪었던 회심의 과정도 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 단번에 환골탈태하는 회심의 꽃을 피웠다면,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여정 가운데 진정한 회심에 이르렀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달랐던 두 사람을 하나로 결합시켜 준 바탕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결정적인 회심 사건이 있었다. 사실 베드로는 매우 솔직하고 직설적이며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첫 수난 예고를 듣고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하고 펄쩍 뛰었다. 그리고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하고 장담했을 때, 그것은 결코 가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고 자기에게 맡겨진 과업을 용감하고 당당하게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던 순간에도 “주님, 저희가 칼로 쳐 버릴까요?”(루가 22,49)라고 말하며 나섰는지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가 구원받아야 할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마주하고 주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길에서였다. 베드로의 삶은 우리가 예수님의 길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또 참된 회심 없이 단순히 열정만으로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절망의 밤에 흘렸던 깊은 참회의 눈물은 주님의 자비로운 시선을 통해 주어진 은총의 선물이었다(루카 22,61-62 참조). 바오로 또한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신의 회심 사건을 회고하면서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주님께서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1코린 15,8-10).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한 참된 회심은 그들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 주님의 사도로 거듭나게 했던 결정적인 원동력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오직 그분의 사랑만이 모든 면에서 달랐던 두 인물을 하나로 결합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미사의 감사송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결국 같은 길을 걸었던 두 성인의 아름다운 결합을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 * 김기태 사도 요한 - 인천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전례학을 가르치고 있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8년 6월호, 김기태 사도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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