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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장의 이름이 새겨진 상(賞)을 처음 받았습니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9-29 조회수341 추천수2 반대(0) 신고
    고장의 이름이 새겨진 상(賞)을 처음 받았습니다




상복(賞福)은 좀 있는 편이다. 충남의 최고상이라는 ‘도문화상’을 1999년에 받았고, 대전일보사에서 주는 ‘대일비호대상’도 2008년에 받았다. 도문화상은 상금이 500만원이었고, 대일비호대상은 300만원이었다. 이밖에도 많건 적건 부상으로 상금이 주어지는 충남문학상, 오마이뉴스 2월 22일상, 황희문화예술상, 충남예술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명색 소설가로서 아직 이름 있는 문학상(작품상)을 수상하지 못한 것이 적이 면구스럽긴 하지만, 고장에 몸을 놓고 사는 향토작가 처지에서는 과분할 정도의 평가와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런데 등단 이전의 세월까지 합하면 40년 가까이 고장의 정신문화와 문예마당을 가꾸며 살아온 필자에게는 이상한 구석이 하나 있었다. 고장에서 주는, 즉 고장의 이름이 새겨진 상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일찍이 1980년대 초에 <흙빛문학>을 창간하고, 1990년대 후반에는 <태안문학>도 창간하면서 고장의 정신문화와 문예마당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고장의 문화적 풍모를 위한 일, 고장의 명예를 키워내기 위한 갖가지 많은 일들의 세목과 눈물겨운 고생담들을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고장에서 내 노고들을 평가해주고 보상해주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그것을 유심히 챙겨보는 눈이 있었다. 언젠가 타지방의 독자 한 분이 내게 전화로 질문을 해왔다.

“선생님은 어지간히 상복이 있으신 것 같은데, 자세히 소개된 이력을 보니까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상들 중에 고장에서 주는, 고장의 이름이 새겨진 상은 하나도 없더군요. 고장에서 주는 상은 못 받으신 겁니까, 아니면 상을 받았지만 고장에서 주는 작은 상이라서 이력에 넣지 않으신 겁니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질문을 드려 봅니다.”

나는 잠시 당황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님도 고향에서는 대접 받지 못했습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대접 받지 못한다’는 말씀도 하셨구요.”  

통화는 간단히 끝났지만, 긴 여운이 내 뇌리에 남았다. 세상에는 저런 사람도 있구나. 그런 하찮은 부분에까지 세밀히 살펴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있어 세상은 발전하는 게 아닐까?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내가 글을 쓰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오래 내 뇌리를 맴돌았다.

일찍이 고장의 이름이 새겨진 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있었다. 1996년이었다. 그해는 정부에서 ‘문학의 해’로 지정한 해였다. ‘문학의 해’를 맞아 <흙빛문학회>에서 나를 ‘태안군민대상’ 후보로 추천했다. 태안군민대상 중에는 ‘문화‧교육‧체육’ 부문이 있는데, 반드시 로테이션을 한다는 법은 없지만, 전전년도와 전년도에는 체육계 인사와 교육계 인사가 상을 받았기 때문에 96년에는 당연히 문화계 인사가 상을 받아야 한다는 시각도 있었다. 더욱이 96년은 ‘문학의 해’가 아닌가.

추천서를 접수한 태안읍은 7명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나를 태안군에 태안군민대상 후보로 올렸다. 그해의 태안군민대상 후보 중에 ‘문화‧교육‧체육’ 부문 후보자는 나 한 사람뿐이었다. 이렇게 ‘문화‧교육‧체육’ 부문 단독 후보인 데다가 태안읍에서 7명 전원 만장일치로 올린 후보이니, 더욱이 ‘문학의 해’에 내가 문화‧교육‧체육 부문 태안군민대상을 받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당연지사였다. 그래서 나는 여러 지인들로부터 축하 인사도 미리 받았고, 시상식에 함께 참석하여 나란히 앉아야 할 집사람에게 한복을 맞춰주기도 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은 ‘황색바람’이라는 이름의 신지역감정 바람이 충청도를 휩쓸던 시기였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이라는 정치집단이 충청도민을 혹세무민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 신지역감정 바람에 맞서 싸웠다. 우리나라가 영남과 호남으로 양분된 지역감정만으로도 뼈아픈 역사의 질곡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거기에 충청도까지 지역감정 바람에 휩쓸린다는 것은 너무도 부당한 일이었다.

나는 <태안신문>을 비롯한 여러 지면에 자민련 바람을 맹렬히 질타하는 글들을 썼고, 자민련의 수명을 ‘10년’으로 예언했다. 내 예언은 훗날 정확히 들어맞았지만, 자민련 바람과 싸우던 시절 전화폭력도 자심해서, 전화기신호음에 노모가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다.

1996년도 태안군민대상 심사위원들 중에는 자민련 바람을 질타하는 내 정치적 태도에 반감을 가진 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13명 중에서 8명이 내게 찬성을 하고 5명이 반대표를 던져서 결국 3/2 찬성이 되지 못해 나는 그해 태안군민대상을 받지 못했다.

그 후 나는 태안군민대상을 받겠다고 다시 나서는 짓을 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고, 내 소설을 한 편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심사를 받는다는 것은 치욕이라는 생각도 했고, 반드시 여러 가지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융통성 없는 행정요식도 거부하기로 했다.

그때로부터 무려 15년이 흐른 올해 나는 ‘태안’이라는 고장의 이름이 새겨진 상을 처음으로 받았다. 태안문화원에서 제정한 제1회 ‘태안문화예술상’이다. 지난해 취임한 김한국 문화원장의 열린 시각 덕분에 태안문화예술상이 제정된 것 같은데, 두어 가지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일이 조금은 낯 뜨겁기도 했지만, ‘제1회’라는 것에 구미가 당겨 스스로 신청을 했다. 내가 일찍 상을 받아야 다음에 다른 이들이 부담 없이 상을 받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하여간 지역에서 문화일꾼으로 살아온 40년 세월 끝에서 드디어 고장의 이름이 새겨진 상을 처음으로 받았다. 지난 21일(수) 오후의 일이다. 한복을 입고 간 집사람과 함께 단상에 오르지 못한 것이 영 섭섭하고 수상 소감 한마디 하지 못한 것이 아쉽긴 하지만, 내게 제1회 ‘태안문화예술상’을 주신 태안문화원에 감사한다.

이제 또다시 “선생님의 이력에는 왜 고장에서 주는 상이 하나도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지 않게 생겼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 29일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11.09.29 18:17 ㅣ최종 업데이트 11.09.29 18:18  지요하 (sim-o)  
태그/ 태안문화예술상, 자민련 바람, 태안군민대상
출처 : 고장의 이름이 새겨진 상을 처음 받았습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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