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다.”
이 말씀을 놓고 볼 때 불행한 사람이란
하느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셨는데도
아무런 회개를 않는 사람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아주 감동적인 설교를 하였는데,
그래서 모두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고 이구동성인데
오직 한 사람만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자면 수용체계가 망가진 사람입니다.
담벼락과 같은 사람인데
벽은 소리를 전혀 흡수치 않고
거기에 소리가 부닥치면 그대로 되돌아오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담벼락처럼 귀를 막고 살게 되었을까요?
그에게 외부인은 다 침입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침입자란 원치 않는데도 뚫고 들어오는 사람이지요.
그의 경험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불쾌하게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에겐 좋은 말을 해 줄 사람도
좋은 것을 선사할 사람도 없고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것을 기대하고 문을 열어놓았다가
안 좋은 얘기만 듣게 될 것이기에
문을 열어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으십니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용체계가 일부 망가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하”자만 나와도 귀를 닫아버립니다.
메일로 치면 “하느님”만 나오면
스팸 메일이 되게 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 세상 소리는 아주 수신을 잘 합니다.
이런 경우도 하느님께서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기는 마찬가집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은
기적 할애비가 되도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거부하지 않고
하느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식대로 믿을 뿐이며
하느님을 수용치 않는 경웁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수용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에게 믿음은 자기 신념의 고집이며
고집의 표출일 뿐입니다.
참 하느님을 믿기보다
자기가 믿는 하느님을 고집하는 것이며,
자기가 아는 하느님 이외의
다른 하느님의 현존을 거부하고,
여러 방식으로 그리고 여러 사람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인정치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수용체계가 망가진 것은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도
하느님은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불행한 사람이란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사람이고,
하느님께서 기적을 행하셔도
아무런 변화, 회개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르게 이해하면
회개한 사람은 날마다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