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가해 연중 27주간 화요일 - 더 큰 봉사
어떤 주일학교 교사들을 보면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기 위해서 여기저기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정작 자신들은 집중해서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때는 그렇게 조용하라고 야단치는 선생님들이 더 시끄럽고 미사의 주위를 흩뜨려 트릴 때가 있습니다. 그 선생님들은 그러면서 함께 참여해야 할 미사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립니다. 저는 봉사가 끝나고 그 선생님들이 냉담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저도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주일학교 교사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면 교사하던 사람들 중의 반 정도는 성당에 다니지만 나머지 절반은 냉담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성당 잘 다녀야 한다고 해 놓고 왜 봉사를 그만 둔 지금 많이들 성당에 다니지 않는 것일까요?
사실 봉사가 끝난 후 냉담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봉사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했던 것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원하셨던 봉사가 무엇이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고 유학하면서 한국에 들어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신자들과 함께 미사 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동안 혼자 벽보고 미사 하거나 몇몇의 다른 사제들과만 미사를 하다 보니 참다운 사제의 정체성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제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봉사는 미사에 열심히 참례해 주는 것입니다. 사제가 사제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모두 외적인 봉사에 바빠서 미사에 참례하지 않는다면 사제는 미사를 거행할 필요성을 잃게 됩니다. 미사를 거행할 필요가 없는 사제는 더 이상 사제로서의 존재의 이유를 느낄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예수님일 수 있게 하는 일, 그것이 가장 큰 봉사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말씀’과 ‘성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만약 육체적인 봉사에 바빠서 말씀을 듣지 않고 또 성체도 영하지 않는다면 더 크고 어쩌면 유일하게 중요한 봉사를 제쳐놓고 그리스도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마르타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시중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 분의 말씀만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보기엔 마리아가 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마르타가 보는 것처럼 아무런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봉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보좌 할 때는 월요일 새벽미사가 끝나고 곧바로 서울로 가서 한 수도원의 지.청원, 수련자들에게 오전에 강의를 했습니다. 쉬고 싶은 월요일이었지만 그 피곤한 와중에도 월요일이 기다려졌습니다. 왜냐하면 수녀님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 그 수련자들은 일반 신자들과는 또 다르게 저의 강의를 너무나 집중하여 잘 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쉬는 것보다 가르치는 것이 더 즐거웠던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하시는 그 분 앞에서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는 그 주는 것을 잘 받아주는 것이 더 큰 봉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그 분일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봉사이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원하는 것은 가정부처럼 일을 잘하는 여자가 아닙니다. 자신을 이해해주고 함께 있어줄 순결한 신부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들어주고 당신의 성체를 모셔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미사에 참례해 주는 사람이 오늘의 마리아가 되는 것입니다.
굳이 밖으로 나가서 그리스도를 위해 큰 봉사를 하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봉사는 미사에 참여하여 말씀과 성체 옆에서 자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평일미사에 한 번이라도 더 참례합시다. 그것보다 더 큰 봉사는 없습니다.
<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