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의 세례의 의미 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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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1-10-05 | 조회수85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왜 가톨릭만이 유독 인간의 흥망성쇠의 법칙에서 제외되어 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교회는 인간적이며 동시에 신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그 가르침이 신적이다.
교회의 일원만이 인간적이다.
교회가 시간의 시금석에 견디에 나왔고, 오늘도 변화무쌍한 세파 속에서 항구 불변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약속을 지켜 오셨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16,18)
-억만인의 신앙 53 쪽에서 발췌- 존 오브라이언지음. 정진석 추기경 옮김
교회는 왜 거룩한가?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로 교회의 머리이시기에 거룩한 것이 아닌가?
"거룩함"은 하느님의 본성인가,인간의 본성인가?
"교회의 거룩함은 교회의 창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고, 또 온갖 거룩함의 샘이시기 때문이다.교회의 목적이 사람을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고, 교회의 교리와 성사가 그 자체로 거룩하며 또 거룩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억만인의 신앙51쪽)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셨나?
이렇게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부 하느님께서 직접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드러내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이심을 친히 하늘을 여시고 당신의 말씀으로 선포하시고 증명해 주시는 하느님의 계시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6-17)
세례를 받으신 후의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인간적 차원의 일들이 아니라 신적 차원의 일들이며 그것을 인간적인 조건을 지니고 하시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조건을 그대로 안고 있으시다는 것은 우리들도 하느님의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시고 따르도록 교육하시기 위함이라 이해합니다.
성경은 왜 예수님께서 사생활 중에는 기적을 베풀었다고 전하지 않을까요?
또 한가지는 예수님의 세례는 구약의 엘리사 예언자가 물이 나빠 땅이 생산력을 잃었을 때 사람들에게 소금을 가져오게 하여 나빠진 물을 살린 기적(2열왕2,19-22 참조) 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더러움을 씻는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소금이 되시어 당신께서 물에 들어가심으로써 나빠진 물을 살려주시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보통 악한 세력이 활동하는 본거지로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물에 들어가셨으므로 악한 세력의 패배를 상징한다고 이해합니다.
왜 요한에게 세례를 요청하셨을까?
당신께서 육신을 취하신 상태로 영원히 이곳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으시기에 이 세상의 요한들에게 그 임무를 맏기시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지니시고 이 세상에 영원히 사신다고 상상해 보십시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직접 세례를 받았다 함은 그 자체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권위 있는 어떤 사람이 물건을 팔면 그 사람의 권위를 보고 의심없이 그것을 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의 효과는 하느님께서 보증해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예표로 이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인간들이 죄를 씻기위해 받는 예식을 하심이 수난이라면 물에 잠기심은 죽음이고 물에서 올라오심은 부활의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꼭 필요했나?
모든 것이 성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꼭 필요했다고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합니다.
한 가지는 이 세상의 요한들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청하자 "선생님" 이라는 호칭으로 부릅니다.(마태 3,14 참조)
그렇다면 요한은 누구인가?
루카복음이 전하는 요한을 정리하면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었을 때
즉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 보고 생각하지 않았을 시기에는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고 느끼고 비록 어머니의 입을 통한 고백이긴 해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루카1,41)
그리고 어머니 엘리사벳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잉태되셨는지도 들어서 이미 알고 있지만 왜 그는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하고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는가?
이 사실이 인간은 한계를 가졌음을 말해주는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음의 고백을 인간을 대표로 요한이 예수님께 드리고 있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이 요한에게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늘을 열어 당신을 밝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사건으로 이해 합니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영이 열려 더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고 고백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긴가민가 헷갈리던 요한이 예수님의 신원을 확실히 보고 듣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또 한가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극히 사랑하시는 아드님에 대한 배려(적합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음) 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었기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께 인성을
취하시어 그 사명을 맏기셨지만 그 사명의 길이 어떤 길인지 아니 인간들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잘 아시기에 마지막 사랑을 다 쏟아 부어주실 수 밖에 없었다고 이해합니다.
온전한 하느님이셨지만 또한 온전한 인간을 사신 당신의 아드님이 공생애 동안 겪으시고 견디실 힘을 실어 주시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내일 전쟁이 시작됨을 그것도 실전이 벌어질 것을 알고 그 전쟁터에 아들을 내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오늘을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보여주시고 들려주신 아버지의 음성은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이 되셨을 것입니다.
교회는 왜 예수님의 생애를 두 부분으로 분리 하는가?
예수님의 사생활과 공생활로 분리하여 가르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후에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일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사생활인가? 공생활인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난 후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을 때 무엇으로 물리치셨으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제부터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것들일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요한17,11ㄴ.5,19-20)
예수님의 공생활은 인성을 온전히 가지시고 신성을 나타내시는 사건이 아닌가하고 이해합니다. 혹시 과녁을 잘못 맞추었다면 바른 가르침을 듣겠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이심을 고백하는데 있어서 인성적으로 머리이신지 신성적으로 머리로 정의하는지 그것이 정말 궁금합니다.
아니 두 가지로 분리해도 되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교회는 인간적인 동시에 신적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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