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회개의 시스템화 - 10.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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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10-05 | 조회수464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2011.10.5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요나4,1-11 루카11,1-4
회개의 시스템화
어제 불암사(佛巖寺)에 갔다가 좋은 글귀를 발견했습니다. 부처임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개(開),시(示), 오(悟), 입(入)이란 네 글자로 요약했습니다. 부처님은 모두에게 진리를 열어 보여주셔서 깨달아 들어오게 하게 위해서란 나름대로 구원의 진리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 역시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활짝 열어 보여 주시어 회개의 깨달음으로 지금 여기 하늘나라에 들어와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구원의 하느님이십니다. 닫힌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닫혀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어디나 가득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문제는 내 마음입니다. 마음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도 없습니다. 열고 받아들이는 회개와 환대의 시스템화가 마음공부에 제일입니다.
마음 따라 보는 세상입니다. 마음이 닫혀 있어 어두우면 모두가 어둡게 보이고, 마음이 부정적이고 비관적이면 매사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입니다.
이 편견이나 선입견에 닫혀 있어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의 이웃을 보지 못합니다. 이래서 회개의 시스템화입니다.
부단히 회개로 내 마음을 열고 하느님과 이웃을 받아들이는 환대의 시스템화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미움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활짝 마음을 열고 하느님을 이웃을 받아들이는 환대에 항구할 때 늘 새 하늘, 새 땅의 하늘나라를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고 받아들이고’, ‘열고 받아들이고’의 회개의 시스템에 항구할 때 알게 모르게 마음은 넓어지고 깊어져 하느님 마음을 닮아갈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요나가 제기한 문제를 복음의 예수님은 그 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이율배반적인 내면의 모순적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회개의 선포에 응답하여 구원 받은 니네베 사람들에 기뻐해야 할 요나가 오히려 화를 냅니다. 회개를 선포했지만 내심으로는 니네베 사람들의 멸망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그게 이루어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요나의 대화 과정이 참 익살스럽고 하느님의 유머가 저절로 웃음 짓게 합니다. 요나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 보면서 섬세하게 요나를 회개의 깨달음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주님의 물음에 요나는 일언반구도 없이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자리를 잡고 초막 그늘에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핍니다. 혹시 하느님의 진노의 벌이 떨어지지 않을까 호기심 있게 지켜보려는 심사입니다.
요나를 회개의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느님의 유머 넘치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 오르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쓸게 하시니’
‘하느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셨다.’
도대체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던 아주까리가 죽어 뙤약볕에 기절할 지경이 되자 요나는 죽기를 자처하며 말합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여전히 자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요나에게 하느님은 묻습니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즉각적인 요나의 대답입니다.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이어 하느님은 요나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도록 그의 마음을 여는 회개의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키우지도 않은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죽은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데, 오른쪽과 왼쪽도 가릴 줄 모르는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며 요나의 양심에 호소하는 하느님의 인내와 자비가 참 감동적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방법은 이렇습니다. 하느님은 상대방의 양심에 호소하실 뿐 절대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루카복음 15장에서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항구히 기다리는 아버지 같은 하느님이요 아버지의 처사에 항의하는 철부지 큰 아들을 달래며 설득하시는 자비하신 아버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화를 낸 것은 요나였지 하느님은 끝까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요나를 깨우치는 하느님의 모습이 꼭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의 편협한 마음을 깨우치는 아버지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요나의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양면적인 모습은 바로 우리 모두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이래서 항구한 회개를 위한 회개의 시스템화요 이 회개의 시스템에 따라 매일 평생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과 이웃을 받아들이는 끊임없는 회개의 시스템에 충실할 때 우리 마음은 넓어지고 깊어져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바로 회개의 시스템인 공동전례 기도 중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이 서두 부분이 자비하신 아버지를 향해 우리 마음을 활짝 열게 하고 모두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더불어 우리 마음은 부단히 넓어지고 깊어져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모두가 될 때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는 저절로 해결되고 유혹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 영성생활의 여정은 끊임없이 열고 받아들이는 회개와 환대의 여정입니다.
매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행해지는 회개와 환대의 시스템인 이 거룩한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가 우리 모두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6,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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