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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12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12 조회수315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46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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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 눈에 들어오는 독특한 표현 하나가 나옵니다.

바로 "드러나지 않는 무덤"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을 두고 하신 이 표현이 내내 마음 한 구석에 걸려 생각을 맴돌게 합니다. 도대체 어떤 면들이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쓰게 만들었을까요? 그리고 그냥 들어도 기분이 개운치 않은 이 표현에 담긴 뜻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일까요?


복음의 시작은 바리사이들의 감추어진 모습을 지적하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바리사이들이 사는 모습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가진 겉으로 드러나는 면과 삶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겉으로는 십일조를 지키면서 정작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기본은 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렇게 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유는 그리 마음에 와닿질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윗자리에 서고 인사를 받는 것은 그들이 스승의 자리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이 더 중요할 것 같은데도 예수님은 사람들의 존경과 자신들의 지위를 누리는 바리사이들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에 소홀하다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지위를 누리기 위해 지키고 있는 것은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이라고 부르는 가치가 편견 속에 이루어질 때 얼마나 큰 잘못들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십일조는 사람들이 말하는 '신앙생활'의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자신이 지닌 모든 것 중에 십분의 일을 하느님께 바치며 산다는 것은 생활하는 이에게 하느님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내용은 감사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십분의 일을 기쁘게 포기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생활보다 하느님이 중요하다는 의사표현으로도 느껴지며 대단한 결단과 용기가 없으면 실천하기에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지금도 별로 바뀌지 않은 대단한 신앙 기준입니다. 지키는 종교이든 아니든 말입니다. 십일조의 의무조항이 없는 우리 역시도 어떤 이유에서건 십일조를 지키는 특별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신앙심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부러워하고 질투할만큼 '열심'한 신자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로움이나 하느님 사랑은 신앙생활의 측면 보다는 일상 생활에서 삶의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마음 속에서 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입니다. 아무리 숱한 말로 표현되어도 실제로 살지 않으면 드러나지도 않는 것이고, 정작 출발은 하느님이지만 그 결과는 하느님과 연관되기 보다 삶의 모습으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작 이 부분을 하느님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두 가치에서 근본을 따지자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이 십일조에 앞서고 그 근본이 됩니다. 십일조를 지키는 것은 하느님께 감사하는 삶의 표현이지 그 자체가 하느님께서 요구하시고 지켜야 하는 법으로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이치를 아는 신앙인은 삶에 있어서 기준은 자신이 아닌 하느님의 의로움을 지키며 사는 것이고 그 근본을 주신 하느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에서 삶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여긴다는 의미와 삶에 대한 감사로 십일조를 지키는 것이 마땅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에 있어서 사람들은 동일한 기준으로 세상을 삽니다. 하지만 삶의 결과에 있어서 십일조는 여러 변수를 지닙니다. 삶의 현장이나 결과가 다양하기 때문이고, 그 삶은 십분의 일로 나눌 수 없는 요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지키는 것은 사람들에게 신앙에 있어서 대단한 무게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요소가 됩니다. 분명 눈으로 드러나는 신앙심의 표현이고 거의 독보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가르치고 지키는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백성 사이에서 스승의 자리를 차지한 듯 보입니다. 그리고 이 가치를 통해 그들이 지닌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 마저도 상대적으로 뛰어난 듯 스스로를 표현하고 누리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모든 사람이 실천할 수 없는 눈으로 보이는 가치는 사람을 그렇게 나누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 누리고 있는 이 잘못된 가치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했음을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표현하십니다.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위치와 행동으로 스승의 사람들 사이에서 스승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르치는 것이 하느님을 따르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처지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의 기준대로 살지 않고 삶의 결과물들만 하느님께 바치며 그것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누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가르침이란 하느님을 전혀 다른 분으로 만들고 백성들을 하느님 앞에 전혀 다른 처지로 내몰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신들의 가치가 유지되고 더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은총을 말하며 그 은총이 사람에 따라 차별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천국은 누구에게나 바라는 곳이지만 그곳에 들어가려면 하느님께 잘 보일 수 있는 사람만이 그 자격을 얻는다 말하고 오히려 하느님은 다수를 처벌하고 소수를 뽑아 가려 내시는 심판자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을 말하면서도 늘 눈 앞에서는 죄인들을 가려내고 미리 심판하고 벌주는 일을 되풀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에서 바리사이의 등장에 항상 등장하는 죄인들이 그 증거들입니다. 그들도 바리사이들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라야 할 같은 처지임에도 죄인들은 이미 하느님의 사랑과의 관계가 삭제되버린채로 삶을 사는 그래서 겉으로는 하느님의 백성이나 이미 죄인이며 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하느님께 충실한 바리사이를 섬기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 바리사이에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 앞에 아무런 말 없이 평생을 죄인으로 살며 그들의 말을 목표도 없이 죄인처럼 지키며 삽니다. 그들에게도 하느님의 구원을 가르치고 기적과 같은 은총으로 그들을 주눅들게 하며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느님의 뜻과 무관하게 사는 바리사이들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이 아닌 영원한 저주와 지옥에 앞선 벌을 받은 채 사는 삶으로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조아리며 하느님을 배운 이들은 그들이 쌓아놓은 죽은 삶의 흔적을 따라 하느님을 찾아 다니며 정작 하느님을 점점 더 멀고 높이만 느끼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그럴수록 바리사이들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판단할 아무런 기준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빠질 수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다른 곳에서 같은 가치를 누리는 스승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람들을 공식적은 죄인으로 만들며 사는 사람들, "율법학자"들입니다.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의 잘못을 지적하는 자리에서 율법교사는 소리 없이 듣다가 스승의 자리에 선 이들을 나무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발끈한 것입니다. 그들도 사람들에게 같은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잘못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처음부터 볼수도 느낄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항상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당신을 닮게 창조하신 근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이 때문에 우리는 늘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또 궁금해합니다. 그런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역시도 확인할 직접적인 방법이 없으니 우리는 그분의 사랑조차도 두려워합니다.


여기에 하느님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당신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도구로 선택하신 사람들이고, 그들은 하느님이 모든 세상에 전하는 가치를 전하며 같은 사랑을 받고 같은 하늘 나라를 꿈꾸며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유일하다는 이유가 그들의 가치를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치는 하느님에게서 나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가치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도구가 되었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의 우선 순위를 차지할 수도 없고 그런 일은 하늘나라 자체의 의미를 망가뜨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 약한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그러한 순서마저 사랑이신 하느님의 또 다른 면으로 느낄만큼 약한 사람들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말하고 고백하고 배웠지만 정작 느끼기에 하느님은 사람을 가리시고 은총도 가려 주시며 죄인들을 용서하신다고 말하시지만 우리는 늘 하느님과의 거리에서 몇 단계 수준 높은 은총의 사람들을 알고 있는 이상한 관계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겐 복음의 십일조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자리와 권위가 주어져 있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의 삶이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 오늘 복음은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자신이 하느님에게 무엇을 얼마나 잘 가르치는가가 아니라 자신에게 신자들이 어떤 존재인지가 될 것입니다. 이미 스승의 자리에서 사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겸손하게 사는가가 아닙니다. 사실은 스승도 더 가진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겸손함이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닙니다.

얼마나 사랑하며 사는가? 그것이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지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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